(ㅂ판: 제3편 제11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


제1법칙: 생산된 잉여가치량은 투하한 가변자본의 크기에 잉여가치율을 곱한 것과 같다. (ㅂ판, 409; M321~22)


바꾸어 말해서 그것은 한 자본가에 의해 동시에 착취당하는 노동력의 수와 개별 노동력의 착취도를 합한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 (ㄱ판, 425; M322)


합한 비율이 아니고 곱한 비율이다.


제2법칙: 평균노동일의 절대적 한계--이것은 본래 24시간보다 항상 짧다--는 가변자본의 감소를 잉여가치율의 증대에 의해 보상하는 것의 절대적 한계, 또는 착취되는 노동자 수의 감소를 노동력의 착취도의 제고에 의해 보상하는 것의 절대적 한계를 이룬다. (ㅂ판, 411; M323)


노동자의 수 감소를 잉여가치율 증대로 상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한 노동자가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총가치는 24노동시가 대상화되는 가치보다 작다. 착취율을 높이는 데는 24시간이라는 절대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명약관화한 제2의 법칙은 뒤에 논의할 자본의 경향, 즉 자본이 고용한 노동자 수 또는 노동력으로 전화하는 가변자본 부분을 될 수 있는 한 축소하려는 자본의 경향*(...)에서 발생하는 많은 현상을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ㄱ판, 427; M323~24)


* 부분의 日註: 

제23장(ㅂ판으로는 제25장) 제2절 "축적과 그에 수반하는 집적의 진행에서 가변자본 부분의 상대적 감소" 참조.


제3법칙: 상이한 자본에 의해 창조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양은 [노동력의 가치가 주어져 있고 노동력의 착취도가 같은 경우] 이들 자본의 가변부분의 크기[즉 살아 있는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ㅂ판, 412; M325)


고전파 경제학은 이 법칙을 정식화하지 못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이에 집착하는데, 그것은 이 법칙이 가치법칙 일반의 필연적인 귀결이기 때문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무리한 추상화를 통하여 이 법칙을 현상의 온갖 모순에서 구출하려 하고 있다. 리카도학파가 어떻게 하여 이 걸림돌에 걸려 넘어졌는지는* 뒤에 보여줄 것이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속류경제학은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에서도 현상의 법칙을 무시하고 그것의 겉모습에만 집착하고 있다. (ㄱ판, 429; M325)


"현상의 법칙"보다는 "현상을 지배하고 설명하는 법칙"이 더 적절하다. 

* 부분의 日註:

인간 예수의 외관에 발이 걸려 넘어져 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비유. 구약 이사야서 8: 14, 신약 로마서 9: 31~33, 베드로전서 2: 6~8.

이에 해당하는 성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이니라 (이사야서 8: 14~15)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로마서 9: 31~33)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베드로전서 2: 6~8)


화폐소유자 또는 상품소유자는 [생산을 위해 투하하는 최소금액이 중세의 최대한도를 훨씬 초과하게 될 때] 비로소 현실적으로 자본가로 전환된다. 여기에서도 자연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헤겔이 자기의 {논리학}에서 발견한 법칙, 즉 단순한 양적 차이가 일정한 점에 도달하면 질적 차이로 이행한다는 법칙*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있다. (ㅂ판, 415; M327)


* 부분의 日註: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헤겔의 {대논리학} 제1권 제3편 제2장, B "한도관계의 절선"의 법칙. 또한 {소논리학} 제1부, C "한도(限度)" 참조. 헤겔에 의하면 "이 양적 요소의 변화 속에서, 질을 변화시키고, 정량을 특수화한 것으로서 나타내는 변화의 한 점이 나타나고, 그 결과 변화하게 된 양적 관계가 하나의 한도, 따라서 하나의 새로운 질, 새로운 어떤 것으로 전화한다. (...) 그 추이는 하나의 비약 (...) 양적 변화로부터 질적 변화로의 비약이다"(武市健人 옮김, {대논리학}, 상권 2, {헤겔전집} 6b, 岩波書店, 263~264쪽). 헤겔은 그 예로, 물의 온도 증감이 어느 한 점에 도달하면 갑자기 한쪽은 수증기로 또 한쪽은 얼음으로 변하는 것을 들고, 이 점을 "절선(節線)"이라 부른다. 


한 사람의 화폐소유자나 상품소유자가 자본가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최소가치액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단계에 따라 달라지며, 또 주어진 발전단계에서도 각 생산부문의 특수한 기술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 이런 산업분야에 종사하는 사적 개인들에 대해서 국가보조금이 지급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특정 산업부문이나 상업부문의 사업에 대해 법적으로 독점권을 갖는 회사 - 이것이 바로 근대적 주식회사의 선구이다 - 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ㄱ판, 431~32; M327~28)


위의 “독점권을 갖는 회사”에는 “이런 종류의 회사를 마르틴 루터는 ‘독점회사’*라고 일컫는다”는 주가 있다. 


* 루터의 『상거래와 고리대에 대하여』, 비텐베르크, 1524년(바이마르판, 제15권, 312쪽). 루터는 이 설교에서 국회의 독점 금지 결의에도 불구하고 방치되고 있는 ‘독점상회’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자본은 또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좁은 범위의 욕망보다 더 많은 노동을 수행하도록 강요하는 하나의 강제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ㄱ판, 432; M328)


강조 부분은 "좁은 범위의 욕망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노동(좁은 범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노동)만으로는 자본은 잉여가치를 얻을 수 없으므로 더 많은 노동을 강요하게 된다. 이러한 "노동일의 단순한 연장을 통한 잉여가치의 생산은 생산양식 그 자체의 변화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생산과정을 노동과정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노동자가 관계하는 생산수단은 자본으로서가 아니라 노동자의 합목적적 생산활동의 단순한 수단과 재료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가죽 제조업에서 노동자는 동물의 가죽을 자신의 단순한 노동대상으로 취급한다. 그가 가죽을 무두질하는 것은 자본가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산과정을 가치증식과정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생산수단은 이제 타인의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뀐다. 이제는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하게 된다. (ㄱ판, 432~33; M328~29)


'무두질'이 또 나온다. 생산과정을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두 가지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달라지는가. 전자에서 노동자는 노동대상을 다루는 주체가 되지만 후자에서는 그 스스로가 생산과정에서 소비된다. 그런데 강조 부분이 좀 재미있다. 이 부분의 영어판과 일어판을 보면 이렇다.  

It is not the capitalist whose skin he tans. (MIA)

彼がなめすものは資本家の皮ではない。(일판) (그가 무두질하는 것은 자본가의 가죽이 아니다.)

이 문장에 달린 日註: 

가죽제조업자가 도제를 훈련시키기 위해 호되게 두들겨패는 것을 '도제의 가죽을 무두질한다'고 했다는 데서 유래한 관용어이자 학생용어의 풍자를 돌려쓴 것. 

일판에서는 왜 이런 설명을 덧붙인 걸까? 도제를 훈련시키기 위해 가죽을 무두질하듯이 도제를 마구 두들겨패는 관습이 있었던 모양이다. 자본가 소유의 가죽이냐, 아니면 자본가의 껍닥이냐... 전자여야 말이 되긴 하는데 이 설명을 보고 나니까 어쩐지 자본가의 진짜 가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4장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3절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ㅂ판: 제6장 노동력의 구매와 판매)에서 나왔던 무두질 관련 부분에서는 노동자의 진짜 가죽이었는데 이번에는 뭘까.  


전자[자본가]는 거만하게 미소를 띠고 사업에 착수할 열의에 차 바삐 걸어가고, 후자[노동자]는 자기 자신의 가죽을 시장에서 팔아버렸으므로 이제는 무두질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겁에 질려 주춤주춤 걸어가고 있다. (ㅂ판, 231; M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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