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지양은 인민의 현실적 행복의 요구이다. 그들의 상태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포기하라는 요구이다. 따라서 종교의 비판은 맹아적으로, 그 신성한 후광 종교인 통곡의 골짜기에 대한 비판이다.

   비판은 사슬에 붙어 있는 가상의 꽃들을 잡아뜯어 버렸는데, 이는 인간이 환상도 위안도 없는 사슬을 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벗어 던져버리고 살아 있는 꽃을 꺾어 가지기 위해서이다. 종교의 비판은 인간을 미몽에서 깨워 일으키는데, 이는 인간이 각성된, 분별 있는 인간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자신의 현실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그리고 그의 현실적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 태양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피안이 사라진 뒤에, 차안의 진리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임무이다. 인간의 자기 소외의 신성한 형태가 폭로된 뒤에, 그 신성하지 않은 형태들 속의 자기 소외를 폭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역사에 봉사하는 철학의 임무이다. 이리하여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정치의 비판으로 전환된다. 

   이하의 상론 - 이러한 작업에의 한 기여인데 - 은 다른 어떤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독일에 닿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무엇보다도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 즉 독일 국가 철학법철학에 닿아 있다. 


-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박종철출판사, p. 2)




마음이 울적하여 일부러 어려운 책을 읽었다. "마르크스는 1843년 쓴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이미 경제적 탐구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강신준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의 오해들)는 부분도 확인할 겸. 마음이 울적하면 술을 마셔야 하는데 이런 걸 읽자니 역시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하간 읽는다. 한 번 슥 읽기만 해도 이해가 되면 참 좋겠지만 그건 꿈이고, 머리가 나쁜 나는 한 문장을 두세 번씩 반복해서 천천히 읽는다. 그래도 이해가 될까 말까 한다. 


"비판은 사슬에 붙어 있는 가상의 꽃들을 잡아뜯어 버렸는데, 이는 인간이 환상도 위안도 없는 사슬을 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벗어 던져버리고 살아 있는 꽃을 꺾어 가지기 위해서이다." 이런 문장을 보면 눈이 호강하는 것 같고 가슴이 좀 두근거린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아직도 문청 기질을 완벽하게 벗어나지는 못한 모양이다. 문학책 읽은 지가 백만년이 지났는데도. 그래서인지 이 글에서 더 중요한 핵심 부분은 뒤쪽에 있는 듯하지만 그냥 이 부분을 인용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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