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의 누진적 생산



자본축적은 처음에는 단지 자본의 양적 확대로만 나타나지만, 앞서 보았듯이 자본구성의 끊임없는 질적 변동[즉 자본의 가변성분을 희생시키면서 불변성분이 끊임없이 증대하는 변동]을 수반하면서 진행된다.* (ㄱ판, 856; M657)


* 이 문단과 다음 본문의 두 문단은, 프랑스어판에서는, 서술은 한층 상세하게, 내용상으로도 새롭게 보충되면서 전개되어 있고, 제3판에서 그 내용이 부분적으로 도입되어 있다.


앞서 제1절에서는 총자본이 증가함에 따라 노동수요도 증가한다고 전제했지만, 실제로는 총자본이 증가할수록 그중의 가변자본 부분은 증대하기는 하지만 비율이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일정한 수의 추가 노동자를 흡수하기 위해서는[또는 옛 자본도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기 때문에 벌써 사용하고 있는 노동자 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총자본의 축적이 누진적으로 가속화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증대하는 축적과 집중은 그 자체가 다시 자본구성의 새로운 변동[즉 불변성분에 비한 가변성분의 한층 가속화된 감소]의 한 원천으로 돌변한다. (ㄱ판, 857; M658)


주어진 크기의 추가 노동자 수를 흡수하기 위해서, 또는 - 구자본의 끊임없는 변태(變態) 때문에 - 이미 기능하는 노동자를 취업시키기 위해서만, 누진적으로 가속되는 총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이 축적과 집중의 증대 그 자체가 자본구성의 새로운 변동의 한 원천, 즉 자본의 불변적 구성부분에 비해 가변적 구성부분이 가속적으로 감소하는 하나의 원천으로 전화한다. (일판)


ㄱ판의 인용 부분은 이상한 번역이다. 추가 노동자를 흡수하기 위해서 뭔가가 더 필요하다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해당 부분을 굳이 고쳐보자면 “일정한 수의 추가 노동자를 흡수하기 위해서[또는 옛 자본도~위해서라도] 총자본의 축적이 누진적으로 가속화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이 정도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추가 노동자를 흡수하고, 기존 노동자를 유지하고, 나아가 “자본구성의 새로운 변동” 즉 가변성분이 불변성분에 비해서 더한층 감소하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변자본의 상대적 감소는 어찌 보면 노동인구가 절대적으로 증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자본의 축적에 따라서 상대적 과잉인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본질과 현상의 전도(顚倒), 자본주의다운 특징이다.


어떤 영역에서든 모두 가변자본 부분의 증대[따라서 사용 노동자 수의 증대]는 늘 격렬한 동요와 일시적인 과잉인구의 생산과 결합되어 있다. (…) 노동인구는 자신이 만들어낸 자본축적에 의해 자신을 상대적 과잉상태로 만드는 수단을 점점 더 많이 산출해낸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고유한 인구법칙 (…) (ㄱ판, 858~60; M659~60)


축적의 산물인 과잉 노동인구, 산업예비군은 축적의 지렛대 역할을 하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존재조건이 된다. 자본을 위해 언제나 대기 중인, 자본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착취 가능한 인간재료”다. 

 

축적과 그에 수반하는 노동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돌발적인 자본의 팽창능력도 증가하는데, (…) 신용이 이 부 가운데 엄청난 부분*을 추가자본으로 생산에 사용하도록 제공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ㄱ판, 860; M661)


* “엄청난 부분”(일판: 異常한 부분)은 프랑스어판에서는 “소유자가 증식을 학수고대하여, 끊임없이 적당한 시기를 노리고 있는 신자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ㅂ판에서는 “매우 큰(unusual) 부분”이다. 독어 원문으로는 ungewöhnlich(보통이[일상적이] 아닌, 비범[비상]한, 진기한, 신기한). 


근대산업의 모든 운동형태는 노동인구의 일부를 끊임없이 실업자 또는 반실업자(半失業者)로 전환시키는 것에 의거하고 있다. 정치경제학의 천박성은 그것이 산업순환의 주기적 변동의 징조에 불과한 신용의 확대와 축소를 그것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고 있다. (ㅂ판, 864; M662)


이후 이어지는 경제학자 비판에서도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이들은 원인과 결과를 거꾸로 이해한다. 그럼에도 산업순환의 주기성이 확실해지면 이들 역시 상대적 과잉인구를 근대산업의 필요조건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 과잉인구의 생산[또는 노동자들의 유리]은 [축적의 진전에 수반하거나 그것에 의해 촉진되는] 생산과정의 기술적 변혁보다 더욱 급속히 진행되며, 또 [기술적 변혁에 대응하는] 불변자본부분에 비한 가변자본부분의 상대적 감소보다 더욱 급속히 진행된다. (ㅂ판, 868; M665)


생산수단은 그 규모와 작용력이 커짐에 따라서 점점 노동자의 고용수단과는 무관해지지만, 이런 관계도 다시 노동생산력이 증대됨에 따라 자본이 자신의 노동공급*을 자신의 노동자 수요보다 더 급속하게 증대시킴으로써 수정된다. 노동자계급 가운데 취업한 노동자들의 과도노동은 산업예비군의 대오를 팽창시키지만, 거꾸로 이 예비군은 다시 그들 간의 경쟁을 통해 취업 노동자계층에게 압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취업 노동자들이 과도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물론 자본의 전제에도 굴종하도록 만든다. (ㄱ판, 865; M665)


* 노동의 생산력 증대, 노동일의 연장, 노동강화 등에 의한 노동 공급량.


한편은 “과도노동”으로, 다른 한편은 “강요된 태만”으로 고통 받는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개별 자본가에게는 치부 수단이 되며 산업예비군의 생산을 촉진한다. 


이 요인이 상대적 과잉인구의 형성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영국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노동 ‘절약’을 위해 영국이 이루어놓은 기술적 수단*은 엄청나다. (ㄱ판, 866; M666)

 

* 프랑스어판에는 “기술적 수단의 양, 다양성, 그리고 완벽함”이라고 되어 있다.

 

임금은 노동자 인구의 절대수가 변동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산업예비군의 팽창과 수축에 의해 규제된다. 앞서 1절에서도 자본축적의 변동이 독립변수고 노동력의 변수가 종속변수라고 했듯이, 노동의 수요와 공급은 자본의 운동에 종속된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반대로 본다. 자본축적 → 임금 인상 → 노동인구 증가 → 노동 공급과잉 → 임금 인하 → 노동인구 감소 → 자본과잉... 이런 식이다. 마르크스는 영국 윌트셔에서 차지농업가들이 임금 인상에 대응하여 (경제학자들의 논리대로 임금 인상 결과 농업노동자들이 증식하여 임금이 하락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더 많은 기계를 도입해버린 사례를 들어, 이 경제학자들의 허술한 논리를 반박한다. 경제학자들의 변호론에 대해 계속되는 비판을 보자. 


새로운 기계의 채용과 낡은 기계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가변자본의 일부분이 불변자본으로 전화하는 경우 경제학적 변호론자는 자본을 ‘구속하고’ 바로 그럼으로써 노동자를 ‘유리시키는’ 이러한 조작을 오히려 거꾸로 그것이 노동자를 위해 자본을 유리시키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ㄱ판, 869; M668)


* 프랑스어판에는, 이 한 문장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임금 재원의 일부가 기계로 전화되었을 때는, 경제학의 공상가들은 이 조작이 이렇게 해서 고정된 자본에 따라 이미 취업한 노동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그들의 미래의 고용과 같은 크기의, 다른 산업부문의 자본을 유리시킨다고 주장한다.” 


제13장 6절, “기계에 의해 쫓겨난 노동자에 관한 보상설”에서 이미 본 것처럼 이 변호론자들은 “노동자를 쫓아낸 기계는 그만큼의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는 자본을 해방시킨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기계 제작으로 고용되는 노동자 수는 쫓겨난 노동자 수보다 적다. 보상설에 대한 내용은 여기 참조.) 


자본의 축적은 한편으로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유리’를 통해 노동자의 공급도 증가시키며, 동시에 실업자의 압력은 취업자에게 더 많은 노동을 지출하도록 강요하고,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노동공급을 노동자의 공급에서 분리시킨다. 이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수요 공급 법칙의 운동은 자본의 전제(專制)를 완성한다. (ㄱ판, 870; M669)





제4절 상대적 과잉인구의 여러 존재형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 법칙

(ㅂ판: 상대적 과잉인구의 상이한 존재형태.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



과잉인구는 크게 세 가지 형태를 띤다. 1) 유동적 형태, 2) 잠재적 형태, 3) 정체적(停滯的) 형태. 


1) 근대산업의 중심(공장, 제련소 등)에서 노동자들은 축출되거나 흡수된다. 이때 과잉인구는 유동적인 형태로 존재한다. 해고되기 쉬운 성인 노동자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중년 노동자나 대공업 노동자들도 이 대열에 떨어지기 쉽다.  


2) 농촌 인구의 일부가 끊임없이 도시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는 것에서 보듯 농촌 안에는 잠재적 과잉인구가 있다. 

 

3) 정체적 과잉인구는 현역 노동자 집단의 일부이긴 하지만 취업 상태가 매우 불규칙하며, 생활 형편은 노동자계급의 평균 이하이다. “이들은 자유롭게 이용 가능한 노동력의 마르지 않는 저수지를 자본에 제공한다”(ㄱ판, 873; M672)


끝으로, 상대적 과잉인구의 가장 밑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부분이 바로 피구휼빈민(ㅂ판: 구호빈민)의 영역이다. (…) 이 사회계층은 세 부류로 이루어진다. 제1부류는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 제2부류는 고아나 빈민 아동들이다. (…) 제3의 부류는 퇴락한 사람, 몰락한 사람, 노동력이 없는 사람 등이다. (…) 피구휼빈민은 노동자 현역군의 상이군인 수용소이자 산업예비군의 사하중*1(死荷重; ㅂ판-고정구성원)을 이룬다. (…) 이 빈민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공비(空費)*2에 속하지만, 그러나 자본은 이 공비의 대부분을 자신에게서 노동자계급이나 하층 중간계급에게로 전가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ㄱ판, 874~75; M673)  


*1 (일판에서는 死重) 선박의 재화(載貨) 중량이나 차량 자체의 무게. 여기에서는 ‘중하’(重荷: 어렵고 무거운 부담), ‘부담’의 의미.

*2 가르니에, 세이 등 프랑스 경제학자가 생산에 직접 공헌하지 않는 비용을 가리키는 데 쓴 말.


산업예비군의 상대적인 크기는 부의 힘과 더불어 증대한다. 그러나 이 예비군이 현역 노동자군보다 커지면 커질수록 고착화되는 과잉인구 - 그들의 빈곤은 노동의 고통에 반비례한다 - 는 점점 더 대량화한다.*1 끝으로, 노동자계급의 극빈층(Lazarusschichte; lazarus layers)*2과 산업예비군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식적인 피구휼빈민도 점점 많아진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축적의 절대적이고 일반적인 법칙이다. (ㄱ판, 875; M673~74, 강조는 원문)

 

*1 초판과 제2판에는 있다가 제3판 이후 없어진 “노동자층”이라는 말을 보충하여 번역했다.

*2 라자로. 신약 누가복음 16장 19~31절 참조. 


"그 집 대문간에는 사람들이 들어다 놓은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앉아 그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다. 더구나 개들까지 몰려와서 그의 종기를 핥았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누가 16: 19~31)


갈수록 증대해가는 생산수단의 양이 사회적 노동생산성의 진보에 힘입어 점차 더 적은 인력지출로도 가동될 수 있다는 법칙 - 바로 그 법칙이 이제 자본주의적 기초[노동자가 노동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하는] 위에서는 노동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노동자가 자신들의 고용수단에 가하는[*자신들을 도살하는] 압력이 더욱 커지고 따라서 노동자의 생존조건(…)도 더욱 불안정해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하여 생산적 인구보다 생산수단과 노동의 생산성이 더 빠르게 증대한다는 사실이 자본주의적 형태에서는 거꾸로 노동자 인구가 늘 자본의 가치증식 욕구보다도 빠르게 증대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ㄱ판, 875~76; M674)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사회적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든 방법은 개별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다. (…)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모든 방법들은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개악하며,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를 독재(…)에 굴복시키며, 그의 전체 생활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며, 그의 처자를 자본이라는 저거노트의 수레바퀴* 밑으로 (…) 질질 끌고 간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모든 방법은 동시에 축적의 방법이며, 그리고 축적의 모든 확대는 다시 이 방법을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된다. 이로부터 자본이 축적됨에 따라 노동자의 상태는 (…) 악화되지 않을 수 없다 (…) 끝으로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 및 활력에 알맞도록 유지한다는 법칙은 (…) 노동자를 자본에 결박시킨다. 이 법칙은 자본의 축적에 대응한 빈곤의 축적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ㅂ판, 880~81; M674~75)


* 인도 동안(東岸) 푸리에서 모시는 거대한 크리슈나 신의 신상(神像). 축제 마지막 날에 힌두교 광신자는 죄를 씻어주는 이 신의 신상을 실은 수레의 바퀴에 치이면 바로 극락에 갈 수 있다고 하여 몸을 던지고 치여 죽는다고 한다.   


자본의 축적은 빈곤의 축적을 낳는다. 오르테스, 타운센드, 슈토르흐, 시스몽디, 데스튀드 드 트라시 등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축적의 적대적 성격을 다양한 형태로 언급하지만, 역시 다양한 혼동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자본주의적 생산의 적대관계는 ‘자연법칙’이다. “빈자와 게으른 자는 부자와 부지런한 자의 필연적 결과물이다”(오르테스). “사회의 가장 천하고 가장 더럽고 가장 열등한 직능을 수행하는 사람이 항상 있다는 것은 하나의 자연법칙이라고 생각된다”(타운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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