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장 이른바 본원적 축적

(ㅂ판: 제8편 이른바 시초축적始初蓄積) 




제1절 본원적 축적의 비밀

(ㅂ판: 제26장 시초축적의 비밀)




23장까지 살펴본 것은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화하고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이었다. 그렇게 축적되기 위한 그 자본이 처음에 어디서 시작했는지 그 출발점을 보자.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를 전제로 하고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로 하며, 또 자본주의적 생산은 대량의 자본과 노동력*1이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있다는*2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 운동과정 전체는 하나의 악순환을 이루면서 회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가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본원적’(ursprüngliche) 축적(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선행적 축적’previous accumulation),*3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라 그 출발점으로서의 축적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ㄱ판, 961; M741) 


*1 프랑스어판에서 “노동력”이 더해졌다. 

*2 프랑스어판에는 “축적되어 있다는”.

*3 “자본의 축적은 그 성질상 분업에 선행해야만 한다” (『국부론』 제2편 서론) 


방직공은 자기의 직물을 완성해서 판매할 때까지 자기를 먹여 살리고 자기에게 작업의 원료 ․  도구를 공급할 충분한 재고가 자기의 수중이나 다른 사람의 수중에 미리 축적되어 있지 않다면, 자기 자신의 특수한 작업에 전적으로 몰두할 수 없다. 이러한 축적은 그가 장기간 이러한 특수한 일에 몰두하기 이전에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물의 본성상, 재고의 축적은 분업에 앞서 이루어져야 하며, 따라서 재고가 미리 더 많이 축적되면 될수록 그것에 비례해서 분업은 더욱 세분된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상)』, 김수행 옮김, 334쪽)


신학의 원죄설은 우리에게 어째서 인간은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먹을 수 있게끔* 저주받았는지를 설명해주지만, 경제학의 원죄설은 그렇게 일을 할 필요가 조금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여 존재하는지를 밝혀준다. 하여튼 전자의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고 후자의 사람들은 결국 팔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뚱이 외에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 (ㄱ판, 962; M741)


* 창세기 3장 19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몸뚱이”가 노동자의 노동력이라는 의미에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아쉬운 번역이다. 일판이나 ㅂ판은 모두 “가죽”이라고 나오고 MEW 원문에도 “Haut”다. 이 ‘가죽’은 제2편 제4장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마지막 부분에도 등장하고(“노동자의 가죽”) 제4편 제13장 기계와 대공업 제8절 “대공업에 의한 매뉴팩처 · 수공업 · 가내공업의 혁명”(여기서는 "노동자의 살갗")에도 나오는 만큼 그냥 넘겨버릴 표현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소유권 문제가 대두되면, 이 어린애 교과서의 시각이 모든 연령과 모든 지적 수준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유일한 정설이라고 고수하는 일이 신성한 의무가 된다.* (ㄱ판, 962; M742)


* 프랑스어판에는 여기에 다음 주가 달려 있다. 


괴테는 이런 어리석은 이야기에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그것을 조롱했다. “학교 선생: 네 아버지의 재산은 대체 어디에서 왔지? 말해보렴. 아동: 할아버지한테서입니다. 학교 선생: 그럼 할아버지는? 아동: 증조할아버지한테서입니다. 학교 선생: 그럼 증조할아버지는? 아동: 증조할아버지는 훔쳤습니다.”(『교리문답』) 괴테의 원문은 “너의 재산은 어디에서 왔느냐”에서 시작해, “아버지, 할아버지”로 끝난다. 마르크스가 비꼬기 위해 바꾼 듯하다. 

   

화폐와 상품이 자본으로 전환되려면 일정한 조건이 필요하다. 생산수단 ․ 생활수단의 소유자와 노동력의 판매자가 대면하는 것이다. 노동력의 판매자는 두 가지 의미에서 자유로운데, 첫째로 (농노나 노예와 달리) 생산수단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둘째로 생산수단과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 본원적 축적은 노동자가 노동조건의 소유에서 분리되고, 직접적 생산자가 임노동자가 되는 과정이다.  


본원적 축적이란 바로 생산자와 생산수단과의 역사적 분리과정이다. 그것이 “본원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은 그것이 자본 그리고 자본에 맞는 생산양식의 전사(前史)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ㄱ판, 963; M742)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생산자가 농노적 에속과 동직조합적 강제에서 해방”되었다는 측면만 강조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이 생산수단과 생존 보장의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점도 놓치면 안 된다. 


임노동자와 자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출발점은 노동자의 예속상태였다. 그것의 진행은 이 예속의 형태변화, 즉 봉건적 착취의 자본주의적 착취로의 전화로 이루어졌다. (ㄱ판, 964; M743)


농촌의 생산자[즉 농민]로부터의 토지수탈은 이 전체 과정의 기초를 이룬다. 이 수탈의 역사는 나라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며, 이 역사가 거쳐가는 각 단계의 순서와 역사적인 시기도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그것이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1 곳은 영국뿐이고, 따라서 우리는 영국을 사례로 보고자 한다.*2 (ㄱ판, 965; M744)


*1 프랑스어판에는 “이 수탈이 철저한(래디컬한) 방법으로 수행되는”.

*2 프랑스어판에는 이 뒤에 다음 부분이 추가되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들도 같은 과정을 거쳤고,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 과정은 환경에 따라 그 지역적 경향이 다르고, 어떤 점에서는 그것이 더 좁은 범위에 갇히거나, 눈에 띄지 않는 특징을 나타내거나, 다른 순서를 따라가거나 한다는 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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