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2절 일반적 정식의 모순

[ㅂ판: 제5장 자본의 일반공식의 모순]



화폐가 탈바꿈하여 자본으로 성장하는 경우의 유통형태는 상품이나 가치, 화폐나 유통 그 자체의 본성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논의된 모든 법칙과 모순된다. 이 유통형태를 단순 상품유통과 구별짓는 것은 동일한 두 개의 대립적 과정[즉 판매와 구매]의 순서가 거꾸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이런 순전히 형태적인 차이가 이들 과성의 본성까지도 요술처럼 변화시킬 수 있었을까? (ㄱ판, 237; M170)


상품소유자 2명이 서로 상품을 구매하고 그 차액을 현금으로 결제한다면 이때 화폐는 계산화폐로서 기능하며 상품 그 자체를 물적으로[현금으로] 상대하지는 않는다. 사용가치 면에서 보면 두 사람은 모두 이득을 얻는다. “교환은 쌍방이 모두 이득을 보는 거래이다”(데스튀트 드 트라시). 하지만 교환가치 면에서 보면 이들은 교환 이전에도 이미 똑같은 가치를 갖고 있었으며 교환한다고 해서 더 늘어나는 가치는 없다. 상품의 가치는 유통 이전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며 유통의 결과로 생겨나지 않는다. 


상품의 가치는 상품이 유통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 가격을 통해 표시되어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유통의 전제이지 결과는 아니다.

  추상화시켜 고찰한다면[즉 단순 상품유통의 내재적 법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요인들을 무시한다면] 어떤 사용가치가 다른 사용가치와 바뀌었다는 것 외에 단순 상품유통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상품의 전형[즉 단순한 형태변화]일 뿐이다. (ㄱ판, 239; M172)


이처럼 상품유통이 오직 상품가치의 형태변화만을 일으키고 그것이 순수한 형태로 이루어진다면, 상품유통은 등가물끼리의 교환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속류경제학자들에게서조차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현상을 순수하게 고찰하려고 할 때는 늘 수요와 공급이 일치한다는 것, 즉 수요-공급의 작용이 없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사용가치에서는 교환 당사자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교환가치에서는 두 사람이 모두 이득을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서는 “평등이 있는 곳에 이득은 없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된다. (ㄱ판, 240; M173)


‘에게서’는 빼야 말이 된다. 결론은 교환을 통해 상품의 단순한 형태변화만이 있었을 뿐 가치크기의 변화는 없다는 것, 순수한 형태의 상품교환은 등가물 간의 교환이므로 가치 증식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상품유통이 잉여가치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시도들의 대표적인 예로 콩디야크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혼동하며, 욕망을 채우고 남은 잉여분을 교환에 던져 넣는 사회를 발달된 상품생산 사회로 바꾸어놓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르 트론은 자기 친구 콩디야크에게 다음과 같이 매우 정확하게 대답하고 있다. “발달한 사회에는 여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콩디야크를 비웃는다. “만약 교환 당사자 쌍방이 똑같은 양으로 자신에게 남는 것을 자신에게 부족한 것과 바꾼다면 그들은 모두 같은 양을 받은 셈이 된다.” 콩디야크는 교환가치의 성질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이 유치한 개념의 보증인으로 빌헬름 로셔를 앞세우고 있다. (ㄱ판, 241 각주 22; M174) 


이 각주의 마지막 문장은 일판과 ㅂ판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콩디야크는 교환가치의 성질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빌헬름 로셔는 그의 유치한 개념에 대해 콩디야크를 증인으로 삼았다.” 콩디야크가 로셔를 보증인으로 내세운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로셔가 콩디야크를 보증인으로 삼았다는 말이다. 


만일 동등한 교환가치의 상품끼리 또는 역시 동등한 교환가치의 상품과 화폐가 교환된다면, 다시 말해서 등가물과 등가물이 교환된다면, 분명히 누구도 자신이 유통에 집어넣은 것보다도 많은 가치를 유통으로부터 빼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잉여가치는 형성되지 않는다. (ㄱ판, 242; M174) 


그럼 부등가교환이라면 어떨까. 판매자는 곧 구매자이기도 하므로 10% 이득을 보고 판다 하더라도 살 때는 결국 그만큼 손해다. 구매자가 상품을 그 가치 이하로 사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가치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소비자가 상품에 대해 가치보다 비싸게 지불하는 데서 잉여가치가 생긴다는 토런스의 주장도 따라서 오류다. 


요컨대 잉여가치의 형성과 이에 따른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판매자가 상품을 가치보다 비싸게 팔든가 구매자가 상품을 가치보다 싸게 사는 방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ㄱ판, 244; M175)


생산은 안 하고 소비만 하는 계급(단순 상품유통의 관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이들의 구매(소비) 능력은 상품 생산자들로부터 온다. 이들한테 비싸게 팔아봤자 내 돈 다시 조금 되돌려 받는 것일 뿐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인격화된 범주만 생각해서 문제일까? 그럼 등장인물을 실제의 개인으로 놓고 보면 어떨까. 세 사람 중 하나가 속임수로 비싸게 팔아먹었다고 하자. 가치가 한 사람에게 이전되어 가치 배분이 달라졌을 뿐이다. 결론은 등가교환이건 부등가교환이건 유통, 즉 상품교환은 아무런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ㄱ판 각주 31(ㅂ판 각주 18)에는 마 선생이 또 깨알같이 세이를 까는 게 나오는데... 세이가 중농주의자들에게서 '글자 그대로' 차용한 말: "교환은 사회의 가치 총액을 조금도 변동시키지 않고, 타인의 재산으로부터 빼앗아 온 것을 자신의 재산에 첨가할 뿐이다." 그러니까 '타인'은 중농주의자, '빼앗아 온 것을 자신의 재산에 덧붙인' 세이. 세이는 중농주의자 르 트론의 저작 중에서 "생산물은 생산물에 의해 지불된다"는 말을 차용해 "생산물은 오직 생산물에 의해 구매된다"(그 말이 그 말)고 한다. 등가교환이건 부등가교환이건 가치 총량은 똑같다. 세이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중농주의자들로부터 뭘 차용해 와도 그 가치가 달라지진 않아! 마 선생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따라서 우리는 자본의 기본형태[즉 근대 사회의 경제조직을 규정하는 자본의 형태]를 분석할 때, 왜 그 유명한 이른바 대홍수 이전의 자본의 모습인*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본래의 상업자본에서는 G - W - G´의 형태, 즉 좀더 비싸게 팔기 위해 구매하는 형태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상업자본의 모든 운동은 유통영역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나 잉여가치의 형성을 유통 그 자체로부터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등가물끼리 교환되는 순간 상업자본이라는 존재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고, 상업자본은 오로지 구매하는 상품생산자와 판매하는 상품생산자 사이에 기생적으로 끼어든 상인에 의해 생산자 양쪽이 모두 사취당하는 경우에만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의미에서 프랭클린은 “전쟁은 약탈이고 상업은 사기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상업자본의 가치증식이 단순히 상품생산자로부터의 사취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려면 기다란 중간부분이 필요한데, 이는 상품유통과 그 단순한 계기들만을 전제로 하는 현단계에서는 아직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ㄱ판, 247; M178~79)


* 구약성서 「창세기」 6~8장, 노아의 대홍수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른바 ‘전기(前期) 자본’을 가리킨다. 


고리대자본은 G - W - G´에서 중간이 없는 G - G´, 즉 화폐가 더 많은 화폐로 교환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자연에 근거하지 않고 서로간의 사취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사기”라고 말했다.  


잉여가치는 유통에서 발생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이 만들어지려면 유통 내에서는 볼 수 없는 무엇인가가 유통의 배후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잉여가치가 유통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외부의 어디에서 발생할 수 있겠는가? (…) 상품소유자는 자신의 노동으로써 가치를 형성할 수는 있지만 스스로 증식하는 가치를 형성할 수는 없다. 그는 새로운 노동을 통하여 기존의 가치에 새로운 가치를 부가함으로써[예를 들어 가죽으로 장화를 만듦으로써] 한 상품의 가치를 증대시킬 수 있다. (…) 유통영역의 외부에서 상품생산자는 다른 상품소유자와 접촉하지 않은 채로는 가치를 증식시키지도 못하고 따라서 화폐 또는 상품을 자본으로 전화시키지도 못한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할 수도 없고, 또 마찬가지로 유통에서 발생하지 않을 수도 없다. 자본은 유통에서 발생해야 하는 동시에 유통에서 발생해서는 안 된다. (ㄱ판, 248~49; M179~80)


이게 자본의 일반적 정식의 모순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다음 절에 나오지만, 위의 인용 부분을 잘 읽어보면 이미 답은 암시되어 있다. 잉여가치를 만드는 잉여노동, 다른 상품생산자와의 접촉...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상품교환에 내재하는 여러 법칙의 기초 위에서 전개되어야 하며, 따라서 등가물끼리의 교환이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아직 자본가의 애벌레에 불과한 우리의 화폐소유자는 상품을 그 가치대로 구매하고 그 가치대로 판매하며, 나아가 그 과정의 끝부분에서는 그가 투입한 것보다 많은 가치를 회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애벌레로부터 나방으로의 성장은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야 하며 또한 유통영역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이 문제의 조건이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한번 뛰어보아라(Hic Rhodus, Hic salta)! (ㄱ판, 250; M180~81)


'나비'라는 좋은 말 놔두고 왜 굳이 나방을... 로도스 섬에서의 점프에 대해서는 heesang님의 글 “(73) 로도스 섬에서의 마르크스의 점프”를 참조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로도스 섬에 관해 여러 가지로 뒤져보고 헤맨 글은 여기 참조. 간단한 것만 지적하면, 이 말은 이솝 우화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 말을 가지고 비틀기를 먼저 시도한 것은 헤겔이다. 


여기서 헤겔은 그리스의 ‘로도스’(섬 이름)를 ‘로돈’(장미꽃)으로, 라틴어의 ‘saltus’(뛰어라)를 ‘salta’(춤추어라)로 약간 변형해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미를 기쁨의 상징으로 본 헤겔은 다름 아닌 현실 속에서 이념을 인식해야만 할 철학이 임무를 다했을 때의 그 기쁨을 이렇게 춤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주, 헤겔, {법철학}, 한길사, 51쪽)


(물론 읽지는 않았지만) 헤겔의 『법철학』에는 “Hic Rhodus, hic saltus”(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와 “Hic Rhodon, hic salta”(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추어라)가 모두 나오는데, 라틴어 salta는 ‘뛰다’가 아니라 ‘춤추다’이다. 마르크스는 이 라틴어들을 (실수인지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임의로 섞어서 또 하나의 문장을 만든 셈이다. “여기가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는 말은, 헛된 관념과 이상을 비웃는 것이기도 하고, ‘뛰어보라’는 실천을 강조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로도스 섬’ 그 자체, 즉 ‘현실’ 그 자체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생각.  


마지막 각주 37(ㅂ판 각주 24)이 내용이 복잡하고 번역도 조금 다른 곳이 있어서 일판을 번역해보았다. (그래도 역시 복잡하다. 평균가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자본론 제3권을 읽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부터 독자는,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자본의 형성은 상품가격이 상품가치와 같은 경우에도 가능해야 한다는 뜻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형성은, 상품가격과 상품가치의 괴리에 의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가격과 가치가 실제로 괴리된 경우에는, 우선 그 가격을 가치로 환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 괴리 상태를 우연적인 것으로 도외시하고, 자본 형성의 현상을 순수하게 상품교환을 기초로 하여 고찰하고, 그렇게 고찰하면서 교란적이고 본래의 과정과는 무관한 부수적 사정에 의해 혼란을 겪지 않게 해야만 한다. 더욱이, 잘 알고 있듯이, 이 환원은 결코 단순한 과학적 절차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시장가격의 끊임없는 동요, 그 등고(騰高)와 저락(低落)은, 서로 보정되고 상쇄되어 그 내적 기준으로서의 평균가격으로 자신을 환원한다. 이 기준은, 예를 들면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모든 기업에서 상인 또는 공업가(제조업자)를 안내하는 별이 된다. 즉 그는 비교적 긴 기간을 전체로서 본다면 상품이 실제로는 그 평균가격보다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바로 그 평균가격으로 팔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만약 그가 이해관계를 떠나서 생각하는 데 관심이 있다면, 그는 자본 형성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가격이 평균가격에 의해, 즉 궁극적으로는 상품의 가치에 의해 규제되는 경우에 자본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을까? 내가 여기서 '궁극적으로'라고 한 것은, 평균가격은 애덤 스미스, 리카도 등이 믿었던 것처럼 상품 가치의 크기와 직접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This reduction is no mere scientific process. (MIA) 

This reduction is not limited to the field of science. (BF)

この還元は決して単なる科学的手続きにすぎないものではない。



강조 부분은 ㄱ판에 가깝다. ㅂ판은 “이러한 환원은 결코 과학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인데, 이러면 의미가 좀 다르지 않나 싶었지만 더 생각해보니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 단지 과학적인 절차로 끝나는 게 아니고 시장가격은 실제로도 그 변동이 상쇄되면서 평균가격으로 환원된다는 것, 이러한 환원은 과학의 영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렇다는 것.




(2013. 10. 27 다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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