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 역시 메타스 님의 글(<자본> 번역 비교 및 비판 - '독일어 제2판 후기'에 대한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감사드린다.





쿠겔만에 대하여.

Ludwig  Kugelmann, 1830~1902. 마르크스가 두터운 신뢰를 둔 활동가이자 의사로, 특히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마르크스 등의 다수파 공작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녔다. 마르크스는 가끔 짬을 내서 쿠겔만에게 편지를 보내 건강이 생각 같지 않다는 등의 사적인 내용과 함께 종종 이론적 · 사상적으로 매우 탁월한 논의를 주고받았다. (중략) 쿠겔만은 제1인터내셔널 대회에서는 1867년의 로잔 대회와 1872년의 헤이그 대회에서 대의원을 맡아 다양한 결의에 참가했다. 특히 헤이그 대회에서는 하노버에서 온 마르크스파의 주도권 장악에 협력했다. (중략) 『자본』 제1권 프랑스어판 및 제2권 간행을 위한 작업으로 쫓기고 있던 마르크스는 쿠겔만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다. (『맑스사전』, 464)


제3장 1절(가치척도)은 면밀하게 수정했다. 그 이유는, 제1판에서 이 절은 산만하게 서술되었고 독자들에게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베를린, 1859년)에 있는 설명을 참조하라고 했던 까닭이다. 제7장 특히 제2절[가치증식과정]은 많이 개작했다. (ㅂ판, 9; M18)


"가치증식과정"이 아니라 "생산물의 가치를 생산물의 비례배분적 부분들로 표시"로 고쳐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7장 2절은 독일어판을 말하는 것으로 영역본인 ㅂ판으로는 제9장 2절이 되기 때문이다. 


책이 매진되어 1872년 1월에는 제2판의 인쇄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1871년 가을이었는데, 이때 나는 다른 긴급한 여러 일 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이다. (ㄱ판, 51; M19)


이 "긴급한 일"은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의 투쟁"을 말한다. (日註)  


『자본론』이 독일 노동자계급의 넓은 범위에 걸쳐 급속히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내 일에 대한 최고의 보상이다. 경제적으로는 부르주아의 입장에 있는 인물이지만 빈의 공장주 마이어 씨가 보불전쟁 중에 간행된 소책자[『빈의 사회문제』, 빈, 1871년]에서 적절하게 서술한 부분에서, 독일인의 세습재산으로 인정되어온 위대한 이론적 감각이 독일의 이른바 교양계급에게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렸지만 그와 반대로 독일의 노동자계급 안에서 새로 부활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판 옮김; M19



독일에서 경제학은 지금 이 시간까지 외래 학문으로만 머물러 있었다. 구스타프 폰 귈리히는 『주요 무역국가의 상업·공업·농업의 역사』, 특히 1830년에 출간한 제1권과 제2권에서 우리나라(독일-옮긴이)에서 자본주의적 발전과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출현을 가로막았던 역사적 조건들을 거의 대부분 설명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경제학의 현실적인 토대가 결여되어 있었다. (중략) 이들은 피할 수 없는 학문적 무력감과 사실상 잘 알지도 못하는 영역에서 모두 다 아는 교수인 척해야 하는 양심의 가책을 은폐하기 위하여 현란한 문헌사적 학식을 둘러대거나 이른바 재정학*(독일의 중상주의 경제학-옮긴이)--청운의 꿈을 품은2) 독일의 관료지망생들이 견뎌내야만 하는 연옥의 불길과도 같은 복잡한 지식들의 혼합물--에서 빌려온 낯선 자료들을 혼합해버리는 방식을 사용하곤 하였다. (ㄱ판, 51~52; M19)


위의 "자본주의적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으로(메타스 님의 글에서 5. 1 부분 참조), "따라서"는 "즉(또는 요컨대)"으로 고쳐야 한다. '따라서'라고 하면 문맥이 이상해진다. "양심의 가책" 부분을 일판에서 보면 "교사인 체해야만 하는 양심의 동요"라고 되어 있다. "재정학"은 일판으로는 ㅂ판과 같은 '관방학'이며 日註가 있다. 

16~18세기 독일 왕후(王侯, 제왕과 제후를 아울러 이르는 말)를 위한 행재정학(行財政學).


편집상의 실수로 보이는데, ㄱ판의 각주 2는 마르크스의 주가 아니다. 역자의 주 아니면 MEW판 편집자의 주다. 일판에는 같은 내용이 편집자 주로 처리되어 있다. 역자의 주라면 본문 안 괄호(글씨 1포인트 작게)로 처리해야 하고, 편집자 주라면 *로 하단 처리해야 한다. 


1848년 이후 독일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급속히 발전했고 오늘날에는 이미 전성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전문가들에게 운명은 여전히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ㄱ판, 52)


일판에서는 "사기(협잡)의 꽃을 피우고 있다"이다(메타스 님의 글 6-1 참조). "전문가"에는 日註가 있다. 

프랑스판에서는 "경제학자"로 되어 있다.


뒤이은 시기인 1820~30년대는 영국의 경제학 영역에서 학문적인 활기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리카도의 이론이 대중화되면서 널리 보급되던 시기였고 또한 리카도 이론이 기존의 고전파 이론과 투쟁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ㄱ판, 53; M20)


일판에서는 ㅂ판과 같이 "속류화"다. 


부르주아들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정권을 획득하였다. 그때부터 계급투쟁은 실천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점차 뚜렷하고 급박한 형태를 띠어갔다. 그리고 계급투쟁은 과학적 부르주아 경제학의 종언을 고하였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떤 정리가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자본에 이로운가 해로운가, 자본에 편리한가 불편한가, 자본이 허락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사심 없는 연구 대신 돈벌이를 위한 논쟁이 자리를 잡았고, 편견 없는 연구 대신 비양심적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변론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공장주 코브던과 브라이트가 선봉에 섰던 곡물법 반대동맹날림으로 만들어 시중에 배포한 조잡한 소책자까지만 해도 토지소유귀족들에 대한 그들의 반론 속에는 비록 전혀 과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역사적인 흥미 정도는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버트 필 이후의 자유무역입법은 이런 마지막 양념조차도 속류경제학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말았다. (ㄱ판, 54; M21)


"자본이 허락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일판에서 "반경찰적(反警察的)인가 아닌가"이다. 메타스 님의 글 9-1에서처럼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ㅂ판)로 옮기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돈벌이를 위한 논쟁"은 "金で雇われた論難攻撃"인데 이게 과연 무슨 뜻인지는 자신이 없다. 직역하면 "돈으로 고용된 논란 공격"이다. "날림으로 만들어 시중에 배포한 조잡한 소책자"는 일판에서 "세상에 뿌린 강요하는 듯한 소책자"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읽으라고 주는 선전물 같은 것이었을까. "양념"은 MIA나 BF에서 모두 sting, 즉 '가시, 찌르기, 괴롭힘, 신랄함'이다. 일판에서도 '가시'다. "곡물법 반대동맹"에 달린 日註.

대토지소유자의 이익을 위해 곡물 수입의 제한, 금지를 목적으로 영국에서 1815년에 제정된 곡물법에 대하여 그 폐지 운동을 벌인 자유무역주의 단체.


체르니셰프스키에 대하여.

Nikolai Garrilovich Chernyshevskii, 1828~89.

러시아에서의 농노제, 토지소유에 관해 일찍부터 경제적 해방을 주장한 나로드니키주의 이론가 중 한 사람. 1860년의 『자본과 노동』에서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이어받아 '근로자의 이론'을 설파하고 그 이론을 러시아에서 철저하게 발전시킴으로써 사회주의에 도달했다. (중략) 1850년대 후반에 저술한 러시아의 공동체와 관련된 논문들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체제 모체로서의 농촌공동체에 주목하고 자본주의 발전단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1870년대 초에 마르크스가 접한 이 주장은 나중에 그의 러시아 혁명론에 변경을 가져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중략) 마르크스는 러시아에서의 이런저런 혁명 정세를 신중하게 참고하면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러시아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혁명 노선을 지지했다. (『맑스사전』, 444)


바스티아에 대하여.

Claude Frédéric Bastiat, 1801~50. 프랑스의 자유무역론자. 당초 상인이었으나 애덤 스미스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이나 케어리의 조화론에서 영향을 받는 동시에 곡물법의 폐지에 공헌한 리처드 코브던과도 교우 관계를 맺으며, 보르도와 파리에서 자유통상협회를 설립하고(1846), 협회 기관지를 창간했다. 나중에는 헌법제정의회 의원, 입법의회 의원도 역임했다. 주저는 『경제조화론』(1848). 전형적인 계급조화주의자로 2월 혁명(1848) 이후에는 사회주의자와의 논쟁에 노력을 기울였는데(『신용의 무상성』(1850)은 프루동과 바스티아의 논쟁서이기도 하다), 조화론적인 그의 이론은 국경을 넘어 독일, 맨체스터 학파의 대표자인 프린스 스미스 등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바스티아는 이익의 조화를 원리에 두고 자연법에 기초한 자유로운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유무역을 주장하며 봉건적 유제와 국가의 간섭을 비판했지만 그의 이데올로기와 경제학적 내용은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중략) 바스티아의 이론은 국가의 제한을 주장하는 것 이외에는 자국의 현실적 관계를 무시한 것으로서, 프랑스의 낮은 생산력을 "영국-미국적 관계들의 가상적 관념 형태"에서 조화적으로 "공상"한 모순적 전개 없는 아류 경제학에 지나지 않는다며 격렬히 비판했다. (『맑스사전』, 172)


독일 부르주아들의 박식하면서도 동시에 무식하기도 한 대변자들은 초기 저작들에 대해서 그들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 수법으로 『자본』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일단 묵살해버리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런 수법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자 그들은 내 책에 대한 비판을 한다는 핑계로 "부르주아적 의식을 진정시키기 위한" 처방전을 쓰기도 했지만 이도 또한 노동자신문에서--『폴크스슈타트』에 실린 요제프 디츠겐의 논문을 보라--그들을 능가하는 투사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들 투사에 대한 답변을 아직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이다. (ㄱ판, 55~56; M22)


"박식하면서도 동시에 무식하기도 한 대변자들"은 오역으로 보인다. 일판에서는 "학자거나 무학자거나 간에"다. "초기 저작"은 "이전 저작"이라고 해야 옳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말한다. 


디츠겐에 대하여.

Joseph Dietzgen, 1828~88. 독학으로 유물론과 변증법에 입각한 철학을 창조한 독일인 수공업자. (중략) 프랑스어와 문학, 철학, 경제학을 독학하면서 점차 사회주의 사상에 이끌리게 되었다. 1848년 혁명 속에서 '신라인신문'을 구독하고 혁명운동에도 참가했기 때문에 반동세력이 승리한 뒤 고향을 떠났다. 4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여러 지역을 방랑하고 자본주의 공업 발흥기의 사회를 관찰했다. 51년 말에 귀향하여 제혁공장 등을 운영하면서 반나절은 생업에, 나머지 반나절은 학문에 몰두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중략) 『공산당 선언』에서 너무도 큰 감명을 받고,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저작들을 깊이 연구하여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을 위한 철학, 특히 인식론의 창조를 지향하기 시작한다. (중략) 67년부터는 마르크스와도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여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자본』 제1권이 출판되자 대학교수들이 이 책을 묵살하는 가운데 책에 대한 서평을 주간지에 연재해서 마르크스에게 용기를 주었다. (중략) 엥겔스는 『포이어바흐론』에서 디츠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와는 별개로, 또한 헤겔로부터도 독립하여 유물론적 변증법을 창조한 "노동자 철학자"라고 쓰고 있다. 또한 맑스도 디츠겐의 업적을 "그의 전적으로 독립된 작업이다", 그는 "천재적인 노동자 중 한 명이다"라며 칭송하고 있다. (『맑스사전』, 111~12)


ㄱ판 56쪽 각주 4의 후반 부분에는 "민족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색채를 띤 독일 교수들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런 종류와는 완전히 또 다른 형태의 머리를 뽀개는 고통을 받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일판에서 옮겨본다. ㅂ판에서는 그냥 "독일의 대다수 학자들을 전혀 닮지 않고 있다"고 끝난다. 


"이 책의 서술은 소수의 특수한 부분을 제외한다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며, 그 대상의 고도의 과학성에도 불구하고 이만저만이 아닌 생생함을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 보통 사람이라면 머리가 깨질 정도로 모호하고 무미건조한 말로 책을 쓰는 ... 많은 독일 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 독일 국민자유당*의 교수식 문헌을 읽는 독자들은 머리와는 전혀 별개의 무언가가 깨지고 있다. (일판)


*에 달린 日註. 

1867년 창립된 국민자유당은, 부르주아지와 지주 등 저명한 학자나 관리를 초함하여 현실 정책의 가면(假面)으로 비스마르크에 의한 위로부터의 독일 통일의 반동정책을 지원하고, 대량의 문서 선전으로 한때 다수 의원을 국회에 보냈지만 후에 제국주의 정당으로 전락했다. 『자본론』 제4판 서문에 나오는 꼬마 라스커는 이 당의 지도자. 


이미 1871년 키예프 대학의 경제학 교수 지베르는 그의 저서 『리카도의 가치 및 화폐 이론』에서 가치, 화폐, 자본에 관한 내 이론이 본질적으로 스미스와 리카도 이론의 필연적인 발전이라고 논증하였다. (ㄱ판, 56; M24) 


『리카도의 가치 및 자본 이론』이 맞는다. 


매우 길게 인용된 카우프만의 논문 제목은 일판에 따르면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의 입장」(1872)이다. 메타스 님의 글 21-1에서 번역이 이상하다고 하셔서 일판을 옮겨본다. ㄱ판은 문맥상 좀 이상하긴 하다. 


마르크스에게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그가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현상들의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법칙은 그 현상들이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취하고 일정한 시기에 관찰될 수 있는 관련을 맺을 경우에만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법칙이 아니다. (ㄱ판, 58; M25)


마르크스에게는 그저 한 가지만이 중요하다. 그가 연구하는 모든 현상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상이 하나의 완성형태를 취하는 한에서, 또한 일정 기간 내에 관찰되는 관련 속에 있는 한에서, 그 현상들을 지배하는 법칙만은 아니다. (일판 번역)  


현상을 좀더 심도 있게 분석하면 사회적 유기체들은 식물이나 동물의 유기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 그렇다, 똑같은 하나의 현상도 각 유기체들의 전체 구조의 차이, 각 구성기관의 차이, 각 기관이 기능을 수행하는 조건의 차이 등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ㄱ판, 59; M26)


현상을 더 깊이 분석하면, 사회적 유기체들도 식물, 동물과 마찬가지로 그들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현상이라도 이 유기체들의 상이한 총체적 구조, 그것들의 개개의 기관의 다양성, [기관이 기능하는] 조건들의 차이 등등으로 말미암아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ㅂ판, 17~18)


문장 자체로는 말이 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읽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부분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ㅂ판이 옳고 ㄱ판은 오역이다. 사회적 유기체가 식물/동물과 다르다는 게 아니라(그거야 당연하지!), 식물/동물 유기체들도 각각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사회적 유기체들 사이에도 이런저런 차이가 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자본』 제1권을 집필하고 있는 바로 지금은 독일의 식자층 사이에서 큰소리깨나 치는 돼먹지 않게 시건방지고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 헤겔을 마치 "죽은 개"처럼--레싱 시대에 대담한 멘델스존이 스피노자에 대해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다루어도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ㄱ판, 60~61; M27)


집필 끝난 지가 언젠데 "바로 지금"이란 말인가. 지금은 2판 후기를 쓰고 있는 중인데. '집필하던 그때는' 정도로 고쳐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가득 찬 운동은 근대산업이 겪는 주기적인 순환의 부침을 통해서 실천적인 부르주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데, 이런 부침의 절정이 바로 일반적 위기이다. 이 일반적 위기는 아직 예비단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긴 하지만 다시 진행 중이며 거의 모든 영역에서 매우 높은 강도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신성 프로이센 독일 제국의 벼락부자들에게도 변증법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ㄱ판, 61)


마지막 부분이다. 이 끝에 긴 日註가 있는데 옮겨본다. 정확한지는 자신할 수 없다. 

프랑스어판에서 이 '후기'가 다시 실렸을 때, 여기에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은 주를 덧붙였다. "독일어 제2판 후기는 1873년 1월 24일에 쓴 것으로, 이 공개 간행 후에 얼마 안 가서 여기에서 예언한 공황이 오스트리아, 합중국 및 독일에서 발발했다. 많은 사람들이 전반적 공황은 이렇게 격렬하긴 해도 부분적인 폭발에 의해 말하자면 깎이고(할인되고) 말았다고 오신(誤信)하고 있다. 그러기는커녕 공황은 그 정점을 향하고 있다. 영국이 중심적 폭발지가 되어 그 충격은 세계시장에서 사람들이 느낄 만한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1878년 11월 15일자 다니엘슨에게 쓴 편지에서, 이 주를 언급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프랑스어판 351쪽의 주에서 예언한 영국의 공황은, 결국 몇 주 사이에 발발하였습니다. 나는 친구들 - 이론가이건 실무가이건 - 에게 이 주를 삭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주의 근거가 박약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메리카 북부, 남부의 공황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공황과 영국의 공황이 말하자면 에누리(할인)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 글 작성일: 201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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