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상품의 두 요소: 사용가치와 가치(가치의 실체, 가치의 크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의 부는 '상품의 방대한 집적'으로 나타나며, 개개의 상품은 이러한 부의 기본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ㅂ판, 43; M49)

상품은 우선 외적 대상으로, 그 속성을 통해 인간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적 존재(Ding)이다. 이 욕망의 성질이 무엇인지는, 즉 이 욕망이 뱃속(생리적인 욕구-옮긴이)에서 나온 것인지 머릿속(정신적인 욕구-옮긴이)에서 나온 것인지 그것은 여기에서 중요하지 않다. 또 그 물적 존재가 생활수단, 즉 향유의 대상으로서 직접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가 아니면 생산수단으로서 간접적으로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가도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ㄱ판, 87~88; M49)

상품은, 우선 그 속성에 의해 어떤 종류의 인간적 욕구를 채우는 하나의 물건(物), 하나의 외적 대상이다. 이들 욕구의 성질, 즉 욕구가 예를 들어 위장에서 생기는가 상상에서 생기는가 하는 것은, 사태를 조금도 바꿀 수 없다. 여기에서는 또한 어떻게 해서 물건이 인간적 욕구를 채우는가 - 직접 생활수단으로서 즉 향수(享受)의 대상으로서인가, 아니면 우회하여, 생산수단으로서인가 - 하는 것도 문제는 아니다. (일판, 59)

자본론의 첫머리, 여러 번 읽어서 익숙하지만 보면 볼수록 역시 만만치 않은 부분이다. 상품은 모든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의 '기본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제1편에서는 상품을 파헤치고, 화폐로 나아가고, 제2편에서는 드디어 '자본'을 다루게 된다.) 상품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는 물건으로서 그 욕구의 종류는 상관이 없다. 

위의 마지막 단락은 일판을 되도록 직역한 것이다. ㄱ판과 일판을 비교해 보면 ㄱ판의 문제점이 더 잘 보인다. ㄱ판에는 '물건'을 '물적 존재'로 옮긴 부분이 매우 많은데, 물건이라고 하는 게 더 잘 다가오고 굳이 '존재'라는 어려운 말을 붙일 이유가 없다. 

욕망이냐 욕구냐. ㅂ판에서도 '욕망'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욕망'보다는 '욕구'가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 부분에 달린 각주에는 "욕망은 결핍을 전제로 한다"(ㅂ판), "욕구는 욕망을 포함한다"(ㄱ판)는 내용이 있다. 일판은 다음과 같다. "욕망은 욕구를 포함한다. 그것은 정신의 식욕으로, 육체에서 공복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물건은 정신의 욕구를 채우기 때문에 그 가치를 갖는다."

게다가 제1장이 아무리 어렵다고는 하나 ㄱ판의 저런 식의 역주는 독자를 배려한다기보다는 무시하는 것에 가까운 과잉 친절일 뿐이다. 

각주 3) "물건은 어디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재적 속성"(이것은 사용가치를 나타내는 바본의 독특한 용어이다)"을 가진다. 예컨대 철을 끌어당기는 자석의 능력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ㅂ판, 44; ; M50)

바번은 사용가치 대신에 '내재적 속성'이라는 용어를 썼다는 것. "물건은 하나의 내적인 '가치'(値打ち)를 갖는다"(일판). 속성이 아니라 '가치'라고 되어 있다. 각주 4를 보면 이러한 사용가치를 로크는 "자연적 가치"(natural worth)라고 했다. 네이버 영어사전을 보면 value는 (경제적인) 가치, 가격, worth는 (사람ㆍ사물의 경제적) 가치이며 worth는 실용적이거나 도덕적인 가치에 대해 더 흔히 쓰인다고 한다. 각주 4에서도 "현실적 사물은 게르만계통의 언어로, 사물의 반영은 라틴계통의 언어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영어의 정신"(ㅂ판, 44)이라고 한다. ㄱ판에서는 "직접적인 것은 튜튼어로 표현하고 반성적인 것은 라틴어로 표현"한다고 되어 있는데, 일판은 ㄱ판에 더 가깝다. 

한 물건의 유용성은 그 물건으로 하여금 사용가치가 되게 한다. 그러나 이 유용성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물리적 속성에 의해 주어지고 있으며, 그 상품체와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중략) 상품의 이러한 속성은, 그 유용성을 취득하는 데 인간노동이 많이 소요되는가 적게 소요되는가와는 관계가 없다. (중략) 사용가치는 오직 사용 또는 소비에서만 실현된다. 사용가치는 부의 사회적 형태가 어떠하건 부의 소재적 내용을 형성한다. 우리가 고찰하는 사회형태에서 사용가치는 동시에 교환가치의 물적 담지자다. (ㅂ판, 44~45; M50)

이 부분에서 처음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사용가치, 상품의 물리적 속성에 따라 규정되며 상품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 교환가치를 지고 가는 것(ㄱ판의 "소재적 담지자", 일판의 "素材的担い手”). "소재적 관점에서 상품은 사용가치, 사회적 관점에서 상품은 (교환)가치"((2)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분석한다)가 된다.

교환가치는 우선 양적 관계, 즉 어떤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비율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므로, 교환가치는 어떤 우연적이며 순전히 상대적인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상품 자체에 고유한 내재적 교환가치라는 것은 일종의 형용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ㅂ판, 45; M50~51)

각주 7의 "물건의 가치는 그 물건이 가져오는 것과 똑같은 크기다"라는 말의 장본인 새뮤얼 버틀러에 관한 日註:
17세기 영국의 풍자시인 새뮤얼 버틀러의 시 『휴디브라스』 제2부, 제1가, 465~66행을 바꿔 인용한 것.

첫째, 같은 상품에 적용되는 여러 교환가치는 모두 동일한 어떤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둘째, 교환가치는 일반적으로 교환가치 그 자체와는 구별되는 다른 어떤 내용물의 표현양식이자 '현상형태'일 수 있다. (ㄱ판, 89; M51)

2개의 서로 다른 물적 존재, 곧 1쿼터의 밀과 a첸트너의 철 속에는 양자에 공통된 어떤 것이 같은 크기로 들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어떤 제3의 것과 동등한데, 이 제3의 것은 그 자체로서는 전자도 후자도 아닌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모두, 교환가치인 한에서는, 이 제3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ㄱ판, 90; M51)

1쿼터의 밀이 x량의 구두약, y량의 명주, z량의 금 따위로 교환될 수 있다고 하면, 밀의 그러한 여러 가지 교환가치들은 모두 "동일한 어떤 것"을 나타낸다는 것. 그러나 교환가치는 어떤 내용물의 현상형태로밖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 '현상형태일 수 있다'가 아니라 '현상형태로만 있을 수 있다'로 고쳐야 한다. 

1쿼터의 밀과 a첸트너의 철이라는 질도 양도 서로 다른 물건이 서로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양자에 공통된 어떤 것이 같은 크기로" 각각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A와 B가 제3자인 C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 제3자가 과연 무엇인가는 앞으로 가면 밝혀질 것이고... 

이들 노동생산물에 남아 있는 것은 허깨비 같은 동일한 대상성(對象性, Gegenständlichkeit), 곧 무차별한 인간노동의 응결물, 다시 말해 지출된 인간노동의 단순한 - 그 지출형태와는 무관한 - 응결물뿐이다. 이들 응결물은 그저 그것들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고 인간의 노동이 거기에 쌓여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런 공통된 사회적 실체가 응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이들 응결물은 바로 가치(Werte) 즉 상품가치(Warenwerte)이다. (ㄱ판, 91; M52)

어려운 부분이다. 노동생산물에서 사용가치를 배제하면 노동의 유용성이나 구체적 형태가 사라지고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된다. 그러한 노동생산물은 인간노동의 응결물이며 이 응결물이 '가치'(상품가치)라고 하는 것이다. "응결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가치인 게 아니다. 마지막 부분을 일판에서 보자. "그것들에 공통된, 이 사회적 실체의 결정으로서, 이것들은 가치 - 상품가치이다."

나는 사실 위의 내용을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허깨비 같은 동일한 대상성"에 대해서는 이재현의 비판을 그대로 인용해본다. 
MEW판 1권 52쪽의 "gespenstige Gegenständlichkeit"는 잔재주 부리지 말고 고분고분하게 "유령 같은 대상성"이라고 번역해야 좋을 것이다. 그래야만, 3권 48장 삼위일체 정식에서 "추상에 불과하다"고 규정되는 "노동이라는 유령"과도 바로 연결되며(3권 1089쪽), 『공산주의자 선언』의 '유령'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바로 이 자체의 문구 안에서 '유령'과 '대상성'이란 말들이 강렬하게 충돌함으로써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의미가 더 살아나는 법이다. (이재현, 「자본가의 머리로 던져진 솜방망이」, 『황해문화』 2010년 겨울, 494쪽)

그럼 그 가치를 측정하려면? 노동의 양으로 측정하고 그 노동의 양의 척도는 시간이다. 

그것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가치를 형성하는 실체'. 즉 노동의 양으로 측정된다. 노동의 양 그 자체는 노동이 지속된 시간으로 측정되고, 노동시간은 다시 1시간이라든가 하루라든가 하는 일정한 단위를 그 척도로 삼는다. (ㄱ판, 92; M53)

가치의 실체를 이루는 노동은 동등한 인간노동이며, 동일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다. 상품세계의 가치로 자기를 표현하는 사회의 총노동력은, 비록 무수한 개인 단위의 노동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여기에서는 거대한 하나의 동질의 인간노동력으로 간주된다. (중략)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주어진 사회의 정상적인 생산조건과 그 사회에서 지배적인 평균적 노동숙련도와 노동강도 하에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걸리는 노동시간이다. (ㅂ판, 48; M53)

가치로서의 모든 상품은 그저 일정한 양의 응결된 노동시간일 뿐이다. (ㄱ판. 93; M54)

마지막 인용 문장의 '가치'는 일판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는 "교환가치"로 되어 있다. 

서로 다른 개인의 노동력으로 구성된 사회의 총노동력이 동질의 인간노동력으로 간주된다. 이에 대해서 heesang님은 "노동의 이질성은 노동의 동질성이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표현했다. 더 읽어보면,
특이하고, 이질적이며,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떠한 개인의 노동은 동시에 사회의 총노동력이 수행하는 노동이기도 하다. 마치 독립적인 것처럼 나타나는 개인은 사실은 사회적 총노동력의 한 지체로서 기능한다. 여기서 모든 질적 차이는 사라지며, 양적 차이만이 남는다. 


이질적인 개인들의 노동에서 어떻게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도출될 수 있는가. 역시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그 측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전면적인 상품교환으로 표현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는 질적으로 상이한 두 노동 역시 단일한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환원은 이론가의 머릿속이 아니라, 그의 머리 바깥에서, 일상의 경제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어떻게 계산해낼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계산은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생산과 교환을 통해 문제 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론의 난점을 현실의 난점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 생산물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그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쓰는 사람에게 교환을 통해 이전되어야 한다. 끝으로, 어떤 물건도 사용대상이 아니고서는 가치일 수 없다. (ㅂ판, 51; M55)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 즉 사회적 사용가치"가 아니면 상품이 되지 못한다. 또한 타인을 위한 사용가치라고 모두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봉건 영주에게 바치는 공납 등). 상품이 되려면 '교환'을 통해 이전되어야 한다. 


위의 "사용대상"은 일판에 따르면 불어판에서는 "유용물"이라고 한다. 





* 글 작성일: 2012/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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