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상품에 나타난 노동의 이중성

절제목이 조금 다른데, ㄱ판은 "상품에 나타난 노동의 이중성", ㅂ판은 "상품에 투하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일판은 "상품에 표현된(表される) 노동의 이중성"이다. 


처음에는 상품이 우리에게 양면적인 것, 즉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서 나타났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노동도 그것이 가치로 표현되는 경우 이미 사용가치의 창조자로서의 특징을 지니지 않게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상품에 포함된 노동의 이러한 이중적 성질을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 이 점은 경제학의 이해에서 결정적인 도약점이므로 여기서 좀더 자세히 설명해둘 필요가 있다. (ㄱ판, 95~96; M56)


I was the first to point out and to examine critically this twofold nature of the labour contained in commodities. (BF, 132)


마르크스가 상품에 포함된 노동의 이중성을 자신이 처음으로 알아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부분. ㄱ판은 "포함된", ㅂ판은 "투하되어 있는", BF와 MIA는 "embodied"와 "contained", 일판은 "나타난" "포함된"으로 썼다. 큰 차이는 없지만 그래도 '투하'보다는 '포함'이 더 나아 보인다.


저고리는 특정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용가치이다. 그것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종류의 생산활동이 필요하다. 이 생산활동은 그 목적 · 작업방식 · 수단 · 결과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동 - 즉 그것의 유용성이 그 생산물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또는 그것의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들어 스스로를 표현하는 노동 - 을 간단히 '유용노동'이라고 부른다. 이 경우 우리는 노동의 유용효과만 고려한다. (ㅂ판, 52; M56)


Its existence is the result of a special sort of productive activity, the nature of which is determined by its aim, mode of operation, subject, means, and result. (MIA)


유용노동을 설명하는 부분. "그 생산물이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ㄱ판, 96)이다. 위의 인용 문단 둘째 문장에는 "대상"이 빠졌다.  


다양한 사용가치들[또는 상품체들]의 총체는 다양한 유용노동들[유(類) · 속(屬) · 종(種) · 변종(變種)으로 분류된다]의 총체, 즉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이 사회적 분업은 상품생산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반대로 상품생산이 사회적 분업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ㅂ판, 52~53)


온갖 다양한 사용가치 또는 상품체들에는 똑같이 온갖 다양한 유용노동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 분업을 통해서 속(屬) · 종(種) · 과(科) · 아종(亞種) · 변종(變種)들로 분류된다. (ㄱ판, 96; M56)


다양한 종류의 사용가치 또는 상품체의 총체에는, 마찬가지로 다양한 속, 종, 과, 아종, 변종을 달리하는 유용노동의 총체 - 사회적 분업 - 가 나타나 있다. (일판) 


ㄱ판의 오역. 유용노동들이 사회적 분업을 통해서 종, 속, ...으로 분류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다양하게 분류되는 유용노동들의 총체가 사회적 분업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모든 상품의 사용가치에 일정한 합목적적인 생산활동 또는 유용노동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각각의 사용가치는 그 속에 질적으로 서로 다른 유용노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상품으로서 만날 수 없다. 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의 형태를 띠는 사회[즉 상품생산자의 사회]에서는 이들 유용노동의 질적인 차이가 자립적인 생산자의 개인사업으로 각기 독립적으로 운영되다가 하나의 복합적인 체계로[즉 사회적 분업으로] 발전한다. (ㄱ판, 97; M57)


그 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사회에서는, 즉 상품생산자들의 사회에서는, 자립한 생산자들의 사적인 일로서 서로 독립적으로 영위되는 유용노동의 이러한 질적 구별이, 하나의 다지적(多岐的) 체제로, 즉 사회적 분업으로 발전한다. (일판) 


아무래도 일판이 더 자연스럽다. "자립적인 생산자의 개인사업"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유용노동"이고, 이러한 "유용노동들의 질적 차이"가 "사회적 분업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ㄱ판으로 보면 "질적인 차이가...운영되"는 것처럼 보이니까 어색하다.   


사용가치를 낳는 어머니로서[즉 유용노동으로서] 노동은 그 사회형태가 무엇이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존재조건이며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생활을 매개하기 위한 영원한 자연필연성이다. (ㄱ판, 92; M57)


사용가치를 낳는 유용노동은 사회형태와는 무관하다. "사용가치를 낳는 어머니"를 각 판본에서 비교하면 "사용가치의 창조자"(ㅂ판), "labour is a creator of use value"(MIA), "the creator of use-values"(BF), "형성자"(일판)이고 MEW판에서는 "Bildnerin"이라는 표현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지나서 ㄱ판 98쪽(M58)을 보면 "윌리엄 페티가 말했듯이, "노동은 소재적 부의 아버지이고 땅은 그 어머니이다"(Die Arbeit ist sein Vater, wie William Petty sagt, und die Erde seine Mutter)라는 말이 나온다. 앞에서는 어머니고 뒤에서는 아버지인 셈이다. 그러느니 애초에 중성적인 '창조자'나 '형성자'로 하는 게 좋았겠다.  


"이제 사용대상으로서의 상품에서 상품의 가치로 넘어가자"(ㅂ판, 54; M58). 


가치로서의 웃옷과 아마포는 모두 동일한 실체를 지닌 물품이고, 동일한 노동의 객관적 표현이다. 그러나 재단노동과 방직노동은 질적으로 다른 노동이다. (ㄱ판, 98; M58)


가치로서 저고리와 아마포는 동일한 실체를 가진 물건이며, 동질의 노동의 물체적 표현이다. 그러나 재봉과 직포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형태다. (ㅂ판, 54)


Als Werte sind Rock und Leinwand Dinge von gleicher Substanz, objektive Ausdrücke gleichartiger Arbeit. Aber Schneiderei und Weberei sind qualitativ verschiedne Arbeiten. (MEW)


가치로서는, 웃옷과 아마포는 같은 실체를 가진 물건이고, 동종(同種)의 노동의 객관적 표현이다. 하지만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은 질적으로 다른 노동이다. (일판)


위 인용 부분 전까지는 웃옷과 아마포를 예로 하여 구체적 유용노동과 사용가치를 이야기해왔다. 재봉과 직포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은 웃옷과 아마포라는 서로 다른 사용가치를 지닌 물건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사용가치가 아니라 가치라는 면에서 보자면 웃옷이나 아마포나 모두 실체를 가진 물건이고 같은 종류의 노동의 객관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번역이 조금씩 다르긴 한데, 여하간 '같은 종류의 노동'이고 이는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것.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유용한 성격을 제외하고 남는 것,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이다. 


상품의 가치는 단지 인간노동을, 즉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만을 나타낸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장군이나 은행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반해 그냥 인간은 매우 평범한 역할만을 하는데[중략] 인간노동의 경우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이다. 인간노동 일반이란 특별하게 발달하지 않은 보통사람이 누구나 평균적으로 자신의 육체 속에 갖고 있는 단순한 노동력의 지출이다. 물론 단순한 평균노동(einfache Durchschnittsarbeit)도 나라가 다르고 문화수준이 다르면 그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나 현존하는 어떤 사회에서 그것은 일정한 것이다. 복잡노동(kompliziertere Arbeit)은 그저 단순노동(einfache Arbeit)이 제곱된 것 또는 배가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따라서 적은 양의 복잡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노동과 같다. (ㄱ판, 99; M59)


상품의 가치는 순전한 인간노동[즉 인간노동력 일반의 지출]을 표현하고 있다. 부르주아사회에서는 장군이나 은행가는 거대한 역할을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매우 보잘것없는 역할밖에 하지 못하는데, 인간노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간노동은 특수한 방향으로 발달하지 않은 보통의 인간이 자기의 육체 속에 평균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순한 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평균적 노동 자체도 나라가 다르고 문화의 발전단계가 다르면 그 성격도 달라지지만, 일정한 사회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다. 더 복잡한 노동은 강화된(potenzierte) 또는 몇 배로 된(multiplizierte) 단순노동으로 간주될 뿐이며, 따라서 적은 양의 복잡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노동과 동등하게 간주된다. (ㅂ판, 55~56)


상품의 가치는, 인간 노동 자체를, 인간 노동 일반의 지출을 표현한다. 그런데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장군이나 은행가는 중대한 역할을 하고 그에 비해 인간 자체는 매우 초라한 역할을 하지만, 이 경우의 인간 노동도 그와 같다. 그것은 평균적으로, 보통의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특수한 발달 없이, 그 육체 안에 갖고 있는 단순한 노동력의 지출이다. 분명히, 단순한 평균노동 자체는 나라를 달리하고 문화사상의 시대를 달리한다면 그 성격을 바꾸지만, 현재 존재하는 한 사회에서는 주어진 것이다. 더 복잡한 노동은 단순노동의 몇 곱을 한 것, 또는 몇 배를 한 것으로서만 통용되며, 그 때문에 더 작은 분량의 복잡노동이 더 큰 분량의 단순노동으로 동일한 것이 된다. (일판)


ㄱ판 인용한 부분의 [중략]에는 역주가 있고 "직위는 특수한 유용적 성격의 노동을, 직위가 없는 단순한 인간은 인간노동 일반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 부분이 특수와 일반의 대립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복잡노동은 더 많은 단순노동으로 "환원"(ㄱ판에서는 "환산")될 뿐이라고 하는 마르크스의 설명이다. 복잡노동과 단순노동은 특수와 일반이라는 범주로 볼 수 없는 개념이다. 복잡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노동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인데, '특수'가 많은 양의 '일반'으로 환산되지는 않는다.  


아래는 이 역주에 대해 heesang님이 보내주신 비판 의견을 정리한 것.

이 역주에서는 단순노동과 추상노동(혹은 일반노동)을 등치시키고 있는데, 아무리 단순한 반복노동이더라도 그 고유의 질을 가지고 있는 구체노동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추상노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단순노동, 복잡노동은 모두 구체노동이다. 동시에 이 둘은 모두 (가치생산의 측면에서는) 추상노동이기도 하다. (가치생산의 측면에서) 복잡노동은 몇 배로 된 단순노동이다. 


단순노동 vs 복잡노동의 구분은 노동을 구체노동의 측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추상노동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의 구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얼핏 보기에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보이는 노동을 곧바로 추상노동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역주의 문제는 구체노동 중 어떤 것은 직접적인 특수한 것으로 간주하고, 다른 어떤 것은 직접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둘 다 구체노동이면서 추상노동이다. 그 둘 중 하나가 더 복잡하기 때문에 복잡노동과 단순노동의 구분이 생긴다. 그러므로 하나는 구체노동이면서 추상노동이면서 복잡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노동이면서 추상노동이면서 단순노동이다. 


각주 14에 나오는 헤겔 『법철학』의 190절과 그에 달린 주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물은 그의 욕망이 제한되어 있듯이 또한 마찬가지로 충족의 수단과 방법의 면에서도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도 또한 이러한 제한에 종속되어 있긴 하면서도 동시에 이 종속성을 초월하여 자기의 보편성을 증시(證示)하는바, 즉 그는 우선 욕망과 수단을 늘림으로써, 그리고 하나의 구체적인 욕망을 개개의 부분이나 측면으로 세분하고 나누어 그것을 서로 다르게 특수화되고 동시에 더 추상화된 욕망으로 만듦으로써 이를 증시한다.


Remark. [추상]법에서는 그 대상이 인격(Person)이고 도덕의 입장에서는 주체(Subjekt, 주관)이며 가족의 경우에는 가족 성원이고 또한 시민사회 일반에서는 (부르주아로서의) 시민(Bürger)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 욕망의 입장에서는 그것[즉 다뤄지는 대상]은 인간(Mensch)이라 불리는, 표상의 구체화된 존재인 바, 따라서 여기서 처음으로, 그리고 여기서 유일하게, 인간이 이런 의미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갖가지 노동을 그 도량단위인 단순노동으로 환산해내는 여러 비율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생산자들에게는 그것이 관습에 의해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ㄱ판, 100; M59)


생산성은 유용노동의 속성이므로 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그 자체와는 관련이 없다. 동일한 노동은 같은 시간에는 같은 가치크기를 생산한다. 생산성은 더 많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소재적 부의 양이 증가하는데도 그 가치크기는 그에 상응하여 오하려 감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같은 상반된 변화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에서 비롯된다. [중략] 노동의 산출능력을 증대시키고 따라서 노동에 의해 제공되는 사용가치 총량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총계를 단축시킬 때는 이 증대된 사용가치 총량의 가치크기는 감소한다. (ㄱ판, 101~102; M60~61)


요약하면, 상품에 나타난 노동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구체적 유용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추상적 인간노동은 (상품의) 가치를 생산한다.  
 




* 글 작성일: 201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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