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절대적 ·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ㅂ판: 제16장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




장제목 오류. "절대적 ·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아니라 "절대적 · 상대적 잉여가치"(Absoluter und relativer Mehrwert)다. 


지금까지 역사적인 형태와 상관없이 노동과정을 추상적으로 고찰했지만 그것으로는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을 다루는 데 불충분하다는 말로 시작된다. 생산적 노동의 개념은 확장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협소해진다. 


생산물은 개별 생산자의 직접적 생산물에서 하나의 사회적 생산물로, 즉 하나의 전체 노동자 - 직접 또는 간접으로 노동대상을 다루면서 서로 결합되는 노동자 전체 - 의 공동생산물로 전화한다. 그리하여 노동과정 자체의 협업적 성격과 함께 생산적 노동의 개념과 이 노동의 담당자인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도 필연적으로 확장된다. (ㄱ판, 700; M531)


그렇지만 다른 한편 생산적 노동의 개념은 협소해진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의 생산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잉여가치의 생산이다. […] 자본가를 위하여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자, 즉 자본의 자기증식에 이바지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이다. […] 생산적 노동자의 개념은 활동과 유용성 간의 관계 그리고 노동자와 노동생산물 간의 관계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성립된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생산관계 - 노동자가 자본의 직접적 가치증식 수단임을 각인하는 - 도 포함한다. (ㄱ판, 700~701; M532)


개인적인 노동과정에서는 "두뇌의 노동과 손의 노동"(ㄱ판, ㅂ판은 "정신적 노동과 육체적 노동")이 하나로 합쳐지지만, 이제부터는 이것들이 분리, 대립된다. 위의 인용에서 "전체 노동자"(Gesamtarbeiters)는 ㅂ판은 "집단적 노동자", 일판은 "총노동자"다. 어느 것이 적절할까. ("(111) 집단적 노동……"을 참고할 것.) 


학설사를 다루는 이 책의 제4권에서 좀더 자세히 보겠지만 경제학은 옛날부터 잉여가치의 생산을 생산적 노동자의 결정적인 성격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잉여가치의 성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생산적 노동자에 대한 경제학의 정의도 그때마다 달라져왔다. (ㄱ판, 701; M532)


Im Vierten Buch dieser Schrift, welches die Geschichte der Theorie behandelt, wird man näher sehn, daß die klassische politische Ökonomie von jeher die Produktion von Mehrwert zum entscheidenden Charakter des produktiven Arbeiters machte. (M532)


위의 "경제학"은 오역이다. 모두 "고전파 경제학"으로 바꿔야 한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전적으로 노동일의 길이에 좌우되는 반면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노동의 기술적 과정 과 사회의 구성을 완전히 바꾸어버린다. 

그러므로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특수한 생산양식을 전제로 하며, 이 생산양식은 그 방법이나 수단 · 조건과 함께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하고 육성된다. 그러다가 이 형식적 포섭 대신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이 나타난다. (ㄱ판, 701; M533)


ㅂ판에서는 "사회의 인적 구성"이라고 하는데 어느 판본에서도 '인적'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또 "특수한 생산양식"이 아니라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라고 하는데, MEW판을 보면 spezifisch, 영어판을 보면 specifically다. 일판은 ㄱ판과 같다. 선생님의 견해에 따르면, ㄱ판은 직역이고 ㅂ판은 의역인데 ㅂ판이 더 정확한 뜻을 나타내는 좋은 번역이다. specific은 어원적으로 '고유한'이라는 뜻이 있다. '자본주의 고유의'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위의 형식적 포섭(ㅂ판: 형식적 종속)은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실질적 포섭은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과 이어진다.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의 『경제학 노트』(김호균 옮김, 이론과실천사, 1988) 제2부 6장 "직접적 생산과정의 제 결과" 중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 "노동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 부분을 참고할 것. (『경제학 노트』 제2부 "직접적 생산과정의 제 결과"는 원래 『자본론』 제1권, '자본의 생산과정'의 제6장으로 예정하고 썼으나 마르크스의 서술 계획의 변경으로 인해 『자본론』에는 수용되지 않은 원고라고 한다.) 


우리가 이미 지난번 대공업 장에서 보았듯이(노동일의 무제한적 연장)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방법은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는 서로 같아 보이지만, 잉여가치의 운동에 주목하게 되면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일단 확립되어 일반적 생산방식으로 되자마자,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사이의 차이는 잉여가치율을 올리는 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드러난다. 노동력이 그 가치대로 지불된다고 전제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즉, 노동의 생산성 및 그 표준강도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가치율은 노동일의 절대적 연장에 의해서만 제고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는 경우, 잉여가치율은 노동일의 구성부분[즉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의 상대적 크기의 변동에 의해서만 제고될 수 있는데, 임금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그 변동은 노동생산성 또는 노동강도의 변화를 전제한다. (ㅂ판, 687; M534)


"잉여가치의 자연적 토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인간이 초기의 동물상태에서 벗어나 그 노동이 어느 정도 사회화되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잉여노동이 다른 사람의 생존조건이 되는 관계가 나타난다"(ㄱ판, 704; M535). 수천 세기의 역사의 산물로서 노동생산성이 발달하면서 자본관계가 발생한다. 노동생산성은 늘 자연조건에 결부되어 있으며, 자연적 조건이 풍요로울수록 생산자가 생계에 들여야 하는 노동시간은 적어지고 타인을 위한 초과노동이 커질 수 있다. 그러면 노동의 자연조건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자본주의적 생산을 일단 전제한다면, 다른 사정이 불변이고 노동일의 길이가 일정할 때 잉여노동의 크기는 노동의 자연조건, 특히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변동할 것이다. […] 이 생산양식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전제로 한다. 지나치게 풍성한 자연은 "어린애를 걸음마용 끈에 의지하게 만들듯이 인간을 자연의 손에 의지하게 만든다."* 자연은 인간 자신의 발달을 하나의 자연적 필연법칙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 산업의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자연력을 사회적으로 제어할 필요성, 그럼으로써 자연력을 절약하는 것은 물론 인간의 육체적 노동을 통해 최초로 그것을 대규모로 획득하거나 길들일 필요성, 바로 그것이었다. (ㄱ판, 706~07; M536~37)


*의 日註: 

독일의 시인, 극작가, 슈톨베르크 백작 프리드리히 레오폴트(1750~1819)의 시 「자연에 보내는 노래」의 한 구절(『저작집』 제1권, 함부르크, 1828, p. 113)을 약간 바꾼 말. 마르크스는 그의 형인 크리스티안 레오폴트 슈톨베르크(1748~1821)가 번역한 안티파트로스의 시를 자본론 제13장 기계와 대공업 각주 156[ㄱ판, 552; ㅂ판, 548; M431]에서 인용하고 있다. 

슈톨베르크 형제에 대해서는 여기 참조.


이집트의 치수(治水)에 관한 각주 5(ㅂ판은 각주 6)에서 "이집트인은 이것[나일 강의 수량]을 가장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에 달린 日註:

헤로도토스, 『역사』 제2에서, 나일은 하지부터 백 일간 물이 불어나 범람하고, 그리하여 물이 줄어들고 다시 하지가 된다고 설명되어 있다. 


천혜의 자연조건이란 언제나 잉여노동[즉 잉여가치나 잉여생산물]의 가능성만을 부여할 뿐이지 결코 그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의 자연조건 차이는 동일한 노동량으로 충족시키는 욕망의 크기가 나라마다 달라지는 요인이 되며, […] 필요노동시간이 서로 달라지는 원인이 된다. […] 산업이 진보함에 따라서 이 자연적 한계는 점차 후퇴한다. (ㄱ판, 707; M537)


노동자가 잉여노동을 제공해야만 생존을 위해 노동할 수 있는 서유럽사회에서는 잉여노동의 제공이 인간의 천부적 성질이라 생각하기 쉽지만("모든 노동은 반드시 일정한 잉여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프루동, 『빈곤의 철학』, M538) 인도네시아 제도의 예를 들어 이를 비판한다. "숲속에 들어가 빵을 잘라 오는" 그곳에 자본주의적 생산이 도입된다고 가정하면 일주일에 1일만 일해도 먹고살 수 있는데 왜 6일씩이나 일을 해야 하는지 자연은 설명해주지 않는다. 자연의 풍요로움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필요노동시간이 매주 1일이라는 것뿐이다. "그의 잉여생산물이 인간노동의 천부적이고 신비스러운 성질에서 발생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리카도 비판. 잉여가치의 원천에 대해 리카도는 관심이 없으며, 잉여가치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타고난 한 요소로 취급한다." 그럼에도 이윤이 교환(유통)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중상주의에 비하면 발전된 모습이긴 하다. 


그[리카도]의 학파는 노동생산력이 이윤(잉여가치라고 읽어보라)의 발생원인이라고 큰소리로 선언한다. 그것은 중상주의자들에 비하면 하나의 진보였는데, 왜냐하면 중상주의자들은 생산물의 가격 가운데 생산비를 넘는 초과분을 교환에서[즉 생산물을 그 가치보다 비싸게 판매함으로써] 도출하기 때문이다. […]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잉여가치의 원천에 관한 뜨거운 쟁점을 너무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는 올바른 본능을 갖고 있었다. (ㄱ판, 709; M539)


J. S. 밀 비판. 1) 리카도를 속류화한 이들의 논리를 리카도 사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다시 반복하고 있다. 2) "노동시간의 지속을 그 생산물의 지속과 혼동"한다. 3) 노동력의 판매와 구매가 없이도 이윤이 존재한다고 본다. 4)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은 서로 다른데도 같다고 혼동한다. 5) 노동자의 개념을 혼동한다. 좀더 이야기하면, "임금 총액에 대한 지불"을 미룰 수 있는 형편이라면 노동자는 "자본을 사업에 투자하고 사업이 지속되는 데 필요한 자금의 일부를 제공하는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거나, "자본가가 임노동자에게 그 생활수단 전부를 투하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노동을 시장가격 이하(!)로 제공하기 때문에" 노동자를 자본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다음은 사회적 생산의 여러 역사적 형태를 밀이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나는 거의 예외 없이 어디서나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전제로 삼는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에 대한 지불을 포함한 일체를 투하한다고 전제한다. 


지금까지 지구 상에서 거의 예외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을 뿐인 상태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보기 드문 착시현상이 여기에 있다! […] 밀은 솔직하게 인정한다. "자본가가 그렇게 하는 것이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노동자가 만일 노동이 완료될 때까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갖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임금 총액에 대한 지불을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 그는 어느 정도 자본을 사업에 투자하고 사업이 지속되는 데 필요한 자금의 일부를 제공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다. (ㄱ판, 711; M540)


위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인데... "오히려 그 반대이다"의 원문은 im Gegenteil(오히려, 반대로, 그렇기는커녕)이다. ㅂ판에서는 "그와는 반대로"라 했고, 일판에서는 "그렇기는커녕, 이렇게 말한다"고 했는데 이게 그다음 인용문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좀 모호하다. 다음과 같이 읽어보았다. 


i) 자본가가 반드시 (노동자에 대한 보수를 포함한) 모든 비용을 투하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자가 지불을 기다릴 수 있다면 자금을 제공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다. 

ii) 자본가가 반드시 (노동자에 대한 보수를 포함한) 모든 비용을 투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저러한 경우에는) 노동자가 자금을 제공하는 자본가가 될 것이다. 


요약하면, 밀은 자본가가 노동자에 대한 지불을 포함한 일체 비용을 투하한다고 전제하면서도 그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필연적이기는커녕 노동자가 자금의 일부를 제공하는 자본가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본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 없지만... 


밀의 이러한 엉터리 논리에 대해 마지막 일침으로 마무리. "오늘날 부르주아 계급의 그 낮은 천박함을 그들의 '위대한 정신'의 눈금으로 측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일판에서 이 문장을 직역하면 "오늘날 우리의 부르주아지의 평범함을, 그들의 '위대한 정신'이라고 불리는 자의 높이의 정도에 의해 헤아릴 만하다." 이토록 형편없는 "위대한 정신"(밀)으로 헤아려보는 부르주아 계급의 천박함은 또 얼마나 형편없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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