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잉여가치율에 대한 갖가지 정식

(ㅂ판: 제18장 잉여가치율을 표시하는 여러 가지 공식)




잉여가치율 공식 복습이다. 아울러 이에 관련된 고전파 경제학의 오류까지.  

 

Ⅰ. 잉여가치(m) / 가변자본(v) = 잉여가치 / 노동력의 가치 = 잉여노동 / 필요노동     


처음 두 개는 가치의 비율이고, 마지막은 이 가치들이 생산되는 시간들 간의 비율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이를 의식적으로 완성을 못했을 뿐 사실상 완성되어 있었다. 다음은 고전파 경제학의 파생적 공식들. 잉여가치율이 잘못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다고 하면 잉여가치율은 절대 100%에 달할 수 없게 된다(잉여가치=생산물가치, 즉 필요노동이 0일 수는 없으므로).

       

Ⅱ. 잉여노동 / 노동일  = 잉여가치 / 생산물 가치 = 잉여생산물 / 총생산물 


위 정식에서 ㅂ판은 '잉여노동'을 '잉여가치'라고 잘못 썼다. 또 정식 Ⅱ의 예를 든 아래 부분에서 ㄱ판은 '12시간의 노동일'을 '12시간의 필요노동'이라고 썼다. 왜들... 


6시간의 잉여노동 / 6시간의 필요노동 = 3실링의 잉여가치 / 3실링의 가변자본 = 100%


6시간의 잉여노동 / 12시간의 노동일 = 3실링의 잉여가치 / 6실링의 가치생산물 = 50%


필요노동이 없어진다면 잉여노동도 없어진다. 왜냐하면 잉여노동은 필요노동의 한 기능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잉여노동/노동일=잉여가치/가치생산물라는 비율이 100/100이라는 한계에 도달하거나 100+(x/100)로 올라가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ㄱ판, 729; M554)


위에서 100+(x/100)이 아니라 (100+x)/100이다. (분수를 표현하기 힘들어 괄호를 썼으며 실제 원문에는 괄호 없음)


잉여가치와 노동력가치를 이처럼 가치생산물의 각 부분으로 나타내는 방법은 〔…〕 자본관계의 특수한 성격[즉 가변자본과 살아 있는 노동력과의 교환, 그리고 그에 따른 생산물로부터의 노동자의 배제]을 은폐한다. 그 대신 노동자와 자본가가 각자 제공한 생산요소의 비율에 따라 생산물을 나누어 갖는 하나의 협동관계라는 허위의 가상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ㄱ판, 730; M555)  


제3의 공식에는 "불불노동 / 지불노동"이 쓰인다. 이는 "잉여노동 / 필요노동"의 통속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한다. 


Ⅲ. 잉여가치 / 노동력가치 = 잉여노동 / 필요노동 = 불불노동 / 지불노동


자본가는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고 "노동력 그 자체에 대한 처분권"을 얻는다. 노동자는 노동력가치와 등가인 가치를 생산할 뿐 아니라 잉여노동으로 자본가를 위한 가치를 만들어낸다. 이 잉여노동 부분을 자본가는 무상으로 얻는다(=不拂노동). 


그리하여 자본은 애덤 스미스가 말했던 바와 같이 그냥 노동에 대한 지휘권(Kommando über Arbeit)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불노동에 대한 지휘권이다. 모든 잉여가치는 나중에 이윤이나 지대 또는 이자 따위와 같은 특수한 형태를 띠지만, 그 실체에서는 불불노동 시간이 물화한 것이다. 자본의 자기증식의 비밀은 타인의 일정한 불불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갖는다는 데에 있다. (ㄱ판, 731; M556)


ㅂ판에서는 "노동에 대한 지배command", 일판은 "노동에 대한 지휘권"이다. 잉여가치가 이윤, 지대, 이자로 나뉘는 것은 제3권에 가면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제5편까지 읽기를 겨우 끝냈지만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은 없다. 제3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제4편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 이어 제5편 "절대적 ·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통해 마르크스가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를 모아서 다시 다룬 이유(참고)를 생각해볼 것. (아직 정리가 안 된 1장 복습도 잊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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