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노동력의 가치 또는 가격의 임금으로의
전화

(ㅂ판: 제19장 노동력의 가치(또는 가격)가 임금으로 전환) 





우리가 이제까지 자주 보아왔듯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는 현상이 본질을 은폐하며, 사물이 원래 모습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 장에서는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라는 본질이 '노동의 가치와 가격' 또는 임금이라는 현상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고전파 경제학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본질과 현상형태의 구별에 대해서 고전파 경제학이 사물의 진상에 가까이 갔으나 이를 정식화하는 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표면에서는 노동자의 임금이 노동의 가격[즉 일정량의 노동에 대해서 지불되는 일정량의 화폐]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 가치의 화폐적인 표현을 노동의 필요가격 또는 자연가격*이라고 일컫는다. (ㄱ판, 735; M557)


*에 달린 日註:

가치를 화폐로 나타낸 경우의 평가를, 애덤 스미스는 '자연가격'이라 이름 붙이고, 프랑스의 중농주의자 튀르고 등은 '필요가격' '기본가격'이라 이름 붙였다. '필요가격'에 대해서는 메르시에 드 라 리비에르의 『정치사회의 자연적 본질적 질서』, 파리, 1767, 407쪽 이하. 또한 '자연가격'에 대해서는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1편 제7장 "상품의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에 대하여" 참조. 


자연가격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어떤 상품의 가격이 그 상품을 제조하여 시장으로 내오는 데 사용된 토지의 지대, 노동의 임금, 자본의 이윤을 각각의 자연율에 따라 지불하는 데 과부족이 없다면, 그 상품은 이른바 그것의 자연가격(natural price)으로 판매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연가격은 모든 상품들의 가격이 끊임없이 그것을 향해 끌려가는 중심가격(central price)이다. 각종 우연한 사건에 의해 상품의 가격이 이 중심가격보다 상당히 높게 유지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그것보다 상당히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가격이 이 안정 및 지속의 중심에 정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무엇이든, 가격은 끊임없이 자연가격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자연가격 그 자체는 그 구성부분 각각, 즉 임금 · 이윤 · 지대의 자연율과 함께 변동한다. 


― 애덤 스미스, 『국부론』, 비봉, 72~82쪽

시장가격이 변동하지만 "끊임없이 자연가격을 향해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그러한 변동은 인정했지만 "자연가격(또는 가치)이 자연적인 수준의 임금 · 이윤 · 지대로 구성된다는 스미스의 이론은 거부한다"는 역주가 있다. 


다시 자본론으로 돌아와서... 12시간 노동일의 가치가 6실링으로 표현된다고 하자. 등가교환으로 노동자가 12시간 노동에 대해 6실링을 받는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라져버린다(잉여가치가 없음). 부등가교환으로 12시간 노동이 10시간, 6시간 등의 노동과 교환된다고 하면 이는 자신을 폐기하는 모순으로서, 법칙이 될 수도 없다. 상품가치의 크기는 상품에 대상화된 노동량이 아니라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으로 결정된다.


'노동의 가치'라는 표현에서 가치 개념은 완전히 소멸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립물로 전도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토지의 가치라는 말처럼 하나의 가상적 표현이다. 그러나 이 가상적 표현들은 생산관계 그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들은 본질적 관계들의 현상형태를 표현하는 범주이다. 사물들이 종종 현상 속에서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은 경제학 이외의 다른 모든 과학에서도 극히 잘 알려져 있다. (ㄱ판, 738; M559)


Daß in der Erscheinung die Dinge sich oft verkehrt darstellen, ist ziemlich in allen Wissenschaften bekannt, außer in der politischen Ökonomie. (M559)


이러한 본질을 표현하는 현상형태, "노동의 가치"라는 표현에 대해서 "시적 파격"이라고 설명하는 프루동, 이어서 세이를 비판하는 각주가 이어진다. 프루동은 "노동의 가치라는 말은 비유적 표현이다"라 했는데,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 사회가 노동의 상품성 위에 기초해 있는데 프루동 말처럼 노동의 가치가 비유라면 사전만 개정해도 사회의 현실적 문제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판한다(『철학의 빈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조한 부분은 ㅂ판에서는 "정치경제학을 제외한 모든 과학에서는"(ㅂ판, 726)인데, 조사 하나 차이지만 ㄱ판처럼 "과학에서도"라고 하면 정치경제학도 그렇고 다른 과학들도 그렇다는 식으로 읽히기 쉽다. '정치경제학을 제외한' 과학들에서는 현상에서 사물이 전도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정치경제학은 그렇지 않지만)는 의미.


다음으로 고전파 경제학이 노동가격의 결정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 이어진다. 수요공급관계의 변동으로는 노동가격의 변동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 가격변동이 멈추면 수요공급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진다. 수요공급과는 무관하게 결정되는 노동의 자연가격이 문제가 된다. 노동의 우연적인 시장가격이 아까 언급한 '자연가격'을 향해 가면서 노동의 가치를 찾을 거라고 스미스는 생각했다. 이들은 노동력과 노동을 구분하지 못한다. 


정치경제학자들은 노동의 시장가격과 이른바 노동의 가치 사이의 차이나, 이 가치의 이윤율에 대한 관계나, 상품의 가치 중 노동수단에 의해 생산되는 부분과 노동의 가치 사이의 관계 등등에 열중한 나머지, 그들은 분석과정에서 노동의 시장가격으로부터 그 가상적인 가치에 이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 노동의 가치 자체를 이번에는 노동력의 가치로 환원시켰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했다. 〔…〕 '노동의 가치' '노동의 자연가격' 등등의 범주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했기 때문에. 고전파 정치경제학은, 〔…〕 혼란과 모순에 빠져버렸으며... (ㅂ판, 728; M561)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이 어떻게 해서 임금이라는 전화한 형태로 나타나는가.


노동의 가치란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불합리한 표현일 뿐이므로 노동의 가치는 언제나 노동의 가치생산물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언제나 노동력을 그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오랫동안 사용하기 때문이다. 〔…〕 6실링의 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 3실링의 가치를 갖는다는 얼핏 보면 어이없는 결론이 얻어진다. 〔…〕 임금의 형태는 노동일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지불노동과 불불노동으로 분할되는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다. 모든 노동은 지불노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그리하여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의 임금형태[혹은 노동 자신의 가치와 가격]로의 전화가 갖는 결정적인 중요성이 파악된다. 현실적인 관계를 은폐하고 오히려 그 반대를 보여주는 이런 현상형태에 기초하여 노동자와 자본가의 온갖 법 개념과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온갖 신비화, 그리고 이 생산양식의 온갖 자유의 환상과 속류경제학의 온갖 변호론적 헛소리가 성립하게 된다. (ㄱ판, 740~41; M561~62)


자본과 노동 사이의 교환은 먼저 우리에게 서로 다른 모든 상품의 구매 및 판매와 똑같은 방식으로 지각된다. 〔…〕 법률적 인식에서 이 경우 둘 사이의 차이는 기껏해야 소재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차이는 법적으로 동등한 다음과 같은 정식으로 표현된다. "네가 주기 때문에 나도 주는 것이고, 네가 하기 때문에 나도 주는 것이다. 네가 하기 때문에 나도 주는 것이며, 네가 하기 때문에 나도 하는 것이다."* (ㄱ판 741~42; M563)


* 유스티아누스나 울피아누스에서 유래한 로마법의 계약에 관한 금언에서 『학설휘찬(學說彙纂)』, 특히 그로티우스의 『전쟁과 평화의 법』, 파리, 1625, 제2권, 12의 3의 1에 같은 문구가 있다. 후에(1878년) 베벨이 라살과 비스마르크의 교제를 폭로했을 때, 비스마르크가 "당신이 주기 때문에 나도 준다"고 했다는 말로도 알려져 있다. 

 

스미스의 오류.


노동일을 하나의 불변적 크기로 다룬 애덤 스미스는 거꾸로, 생활수단의 가치가 변화하더라도, 그리하여 똑같은 노동일이 노동자에게서 그때그때 다른 화폐량으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노동의 가치는 불변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ㄱ판, 743; M563)


 * 프랑스어판에서는, 스미스의 문장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노동자가 지불하는 가격은, 그것과 바꾸어 그가 받는 재화의 양이 대강 어느 정도인가 하면, 언제나 동일하다. 〔…〕 실제로, 그가 지불하는 가격은 때로는 비교적 많은 재화를, 때로는 비교적 적은 재화를 구매하겠지만, 변동하는 것은 그들의 재화의 가치이며, 그것들을 구매하는 노동의 가치는 아니다." 『국부론』, 파리, 1802, 66, 65쪽. 


각주 9번은 ㄱ판과 ㅂ판의 번역이 약간 다른데 일판은 ㅂ판과 거의 동일하다. ㄱ판처럼 "노동일의 변동을 단지 우연적인 요소로만 사용하였다"고 하는 건 좀 문제가 있는 듯. 이 각주 내용에 대해서는 "국부론 제1편 제8장 노동의 임금에 대하여"를 참조하라는 日註가 있다. 그래서 찾아보니 성과급제와 노동일을 함께 이야기하는 부분은 아래 인용 부분밖에는 없는데, 내가 잘 몰라서 못 찾았을 수도 있다.

임금이 높은 곳에서는 임금이 낮은 곳에서보다 노동자가 더욱 적극적이고, 더욱 부지런하고, 더욱 빨리 움직이는 것을 항상 보게 되는데, 예컨대 스코틀랜드보다는 잉글랜드에서, 그리고 멀리 떨어진 농촌지방보다는 대도시 주변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부 노동자들은, 만약 그들이 나흘 동안에 일주일간의 생활물자를 벌 수 있다면 나머지 사흘은 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노동자들은 성과급제 임금에 의해 후한 보수를 받을 때 과로하기 쉽고, 수년 안에 자신의 건강과 육체를 망치기 쉽다. 

― 애덤 스미스, 『국부론』, 비봉, 7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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