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제1장 상품의 내용은 구구절절이 다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제1절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4절이 가장 의미심장하며 다채롭고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다. 제4절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으려면 아마 앞으로 다섯 번은 더 꼼꼼하게 읽어야 할 듯. 


상품을 그저 물건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신비로울 것은 없다. 늘 보고 쓰는 탁자가 신비롭지 않듯이. 하지만 탁자가 상품으로 등장하게 되면 그것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인 물건으로 전화한다". 


상품은 언뜻 보면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분석해보면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교활함과 신학적 변덕으로 가득 찬 매우 기묘한 물건임을 알게 된다. [중략] 탁자가 상품으로 나타나면 그것은 곧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초감각적이기도 한 물건으로 전화한다.*1 탁자는 자기 다리로 바닥을 딛고 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에 대해서 거꾸로 서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나무의 머릿속으로부터 탁자가 저절로 춤추기 시작한다는 얘기보다 훨씬 더 놀라운 여러 가지 환상을 만들어낸다.25) 


25) 다른 세계가 모두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일 때, 다른 것들을 일깨우기 위해(pour encourager les autres) 중국과 탁자가 춤추기 시작했다는 것이 생각난다. *2 (ㄱ판, 133; M85) 


"metaphysischer Spitzfindigkeit und theologischer Mucken"으로 가득 찬 기묘한 상품. ㅂ판은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고 일판은 "형이상학적 잔말과 신학적인 그럴듯함(심각한 척함)"이다. 왜 이렇게 표현했는지는 상품의 비밀을 분석한 이 절을 끝까지 읽어보면서 생각해보기로 하고... 탁자가 저절로 춤춘다는 얘기는 ㅂ판의 역주나 ㄱ판의 후주를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당시 "영적인 힘으로 탁자를 움직이는 것과 같은 심령술"과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과 관련이 있다.


 *1과 *2의 日註:

*1: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마르테의 정원」의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를 바꿔 쓴 말. 거기에서는 어순이 반대인데, 색기(色氣)가 없는 듯하나 속은 색기가 가득하다는 뜻으로 쓰였다.

*2: 탁자나 도기(陶器)가 춤춘다는 것은 심령술의 일종으로, 1848년 혁명 패배 후 유럽에서 대유행했지만, 마르크스는 여기에서 1850년부터 일어난 중국의 태평천국운동과 그것을 연결하고 있다. 또한 "다른 것들을 일깨우기 위해"라는 표현은 볼테르의 『캉디드』 제23장에서 따온 것이다. 

 

『파우스트』 1부에서 해당 부분을 찾으면 마가레테가 메피스토펠레스에 대해 험담을 하고 간 뒤 그걸 다 엿듣고 있었던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초관능적이면서도 관능적인 구혼자여, 어린 계집이 당신을 우롱하고 있소이다"(『파우스트 1』,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227). 『캉디드』의 해당 부분은 캉디드가 포츠머스에 당도해서 어떤 남자가 총살형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에 나온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캉디드가 물었다. "도대체 어떤 악마가 도처에서 이런 권능을 행사한단 말이오?" 그는 방금 사형시킨 그 뚱뚱한 남자가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함대 제독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했다.

"그런데 제독을 왜 죽입니까?"

"사람들을 충분히 많이 죽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독이 전투에서 적 가까이 접근도 하지 않고 프랑스 제독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요."

"하지만 영국 제독이나 프랑스 제독이나 제대로 접근해서 싸우지 않은 건 마찬가지잖소!" 캉디드가 말했다.

"그건 말할 것도 없지요." 누군가가 대꾸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 제독 한 명씩을 죽이는 게 좋다고 합디다." 

- 볼테르, 『미크로메가스 /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이병애 옮김, 문학동네, 164~65


그런 어이없는 장면과 대화가 벌어지고 난 뒤에도 결국 캉디드는 여전히 그 특유의 호구정신과 정신승리를 발휘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선이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어요. 모든 것이 가능한 최선의 상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캉디드』는 볼테르가 라이프니츠의 낙천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자본론에도 몇 번 나오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정말 꼭 읽어볼 만한 재미있는 책이다. 세상의 모든 호구들은 캉디드를 보면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깊은 동병상련의 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볼테르는 나중에 또 나오니 그때 다시...


상품의 신비성은 사용가치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치를 규정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치를 규정하는 내용은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나 초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들이다. (1. 유용노동은 인간 유기체의 기능일 뿐이며, 인간의 두뇌나 근육 등의 지출이다. 2. 노동이 지출된 시간 또는 노동량은 노동의 질과는 구별된다. 3.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노동은 사회적인 형태를 취한다.) 


그러면 노동생산물이 상품형태를 취하자마자 갖게 되는 그 수수께끼 같은 성격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히 이 상품형태 자체에서 나온다. 모든 인간의 노동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이들 노동에 의한 생산물이 모두 똑같이 가치로 대상화된다는 물적 형태를 취하며, 시간의 길이를 기준으로 한 인간노동력 지출의 척도는 노동생산물의 가치크기라는 형태를 취하며, 마지막으로 생산자들의 노동이 사회적 규정성을 확인받는 생산자들 간의 관계는 노동생산물 간의 사회적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ㄱ판, 134; M86)


각종 인간노동이 동등하다는 것은 노동생산물이 가치로서 동등한 객관성을 가진다는 구체적 형태를 취하며, (ㅂ판, 92)


인간노동의 동등성은 노동생산물의 동등한 가치대상성이라는 물적 형태를 취하며, (일판)


Die Gleichheit der menschlichen Arbeiten erhält die sachliche Form der gleichen Wertgegenständlichkeit der Arbeitsprodukte, (MEW)


보다시피 아까 이야기한 '가치를 규정하는 내용'과 하나하나 대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노동의 동등성 → 노동생산물의 가치대상성, 인간노동력의 지출 측정 → 노동생산물의 가치크기, 생산자들 간의 관계 → 노동생산물 간의 관계. 그러니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ㅂ판, 93; M86)


바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ㄱ판은 이를 "착시현상"(Quidproquo; 혼동, 착각)으로, ㅂ판은 "치환"(substitution)으로, 일판은 "入れ替り"(교체, 바꿔 넣기)라고 옮겼다.


그것은 인간 자신들의 일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며, 여기에서 그 관계가 사람들 눈에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그와 유사한 예를 찾으려면 종교적인 세계의 신비경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여기에서는 인간 두뇌의 산물이, 독자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그들 간에 또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자립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상품세계에서는 인간의 손의 산물이 그렇게 나타난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物神崇拜, Fetischismus)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순간 이들에게 달라붙는 것으로서 상품생산과는 불가분의 것이다. 

상품세계의 이러한 물신적 성격은 [중략]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특유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생겨난다. (ㄱ판, 135; M86~87)


다음 문단은 번역상 문제점이 세 가지다.


사적 노동은 교환을 통해 노동생산물 간에 그리고 그 생산자들 간에 형성되는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사실상 사회적 총노동의 한 부분들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사실 그대로[즉 그들이 노동을 통해서 맺는 사람들 간의 직접적인 사회적인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간의 물적 관계 또는 물적 존재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난다. (ㄱ판, 135; M87)


사적 노동은 교환에 의해 노동생산물이, 그리고 또 노동생산물을 매개로 하여 생산자들이 맺어지는 관계를 통해, 사실상 비로소, 사회적 총노동의 분지(分肢)들로서 자기를 발견한다.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서, 즉 사람과 사람이 그들의 노동 그것에서 맺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 간의 물적 관계 및 물건들 간의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일판)


일판을 번역해서 비교해 보면, 우선 ㄱ판에는 "노동생산물을 매개로 하여"가 빠져 있다. 그리고 대괄호를 잘못 묶었다. 그렇게 묶으면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사실 그대로 나타나는 게 되어버린다. 그게 아니고 "사실 그대로로서[즉 그들이 노동을 통해서 맺는 사람들 간의 직접적으로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로 묶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직접적으로 사회적인"으로 고쳐야 한다. 


서로 완전히 다른 여러 노동의 동등성이란 오직 그것들의 현실적인 비동등성을 사상한 것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들의 공통된 성격인 인간노동력의 지출로서, 다시 말해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서 갖는 공통적 성격으로 환원되는 것일 수밖에 없다. (ㄱ판, 136; M87~87)


Die Gleichheit toto coelo <völlig> verschiedner Arbeiten kann nur in einer Abstraktion von ihrer wirklichen Ungleichheit bestehn, in der Reduktion auf den gemeinsamen Charakter, den sie als Verausgabung menschlicher Arbeitskraft, abstrakt menschliche Arbeit, besitzen. (MEW)


서로 '완전히' 다른 노동의 동등성은, 단지 현실의 부등성의 사상(捨象), 노동이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서,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서, 가지고 있는 공통된 성격으로의 환원에서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 (일판)


서로 상이한 각종 노동의 완전한 동등화는, 우리가 그들의 현실적 차이들을 사상함으로써만, 즉 모든 노동을 인간노동력의 지출[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공통적인 성격으로 환원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ㅂ판, 94)


Equality in the full sense between different kinds of labour can be arrived at only if we abstract from their real inequality, (BF, 166)


The equalisation of the most different kinds of labour can be the result only of an abstraction from their inequalities, or of reducing them to their common denominator, viz. expenditure of human labour power or human labour in the abstract. (MIA)

 

'완전히/완전한'이라는 수식어의 위치가 크게 둘로 나뉜다. ㅂ판에서는 '완전한 동등화'고, ㄱ판과 일판은 '완전히 다른 노동'이다. 어쨌든 서로 다른 구체노동들의 동등성은 그 실제의 부등성을 사상하지 않으면, 추상노동으로 환원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는 것. 이러한 사적 노동이 지닌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이 "실제의 교역이나 생산물 교환에서 나타나는 형태로만 비쳐진다". 사적 노동의 유용성이 노동생산물(상품)의 유용성으로 반영되고, 노동의 동등성이라는 사회적 성격이 노동생산물이 지니는 가치라는 공통된 성격으로 반영된다. (자본론에서 늘 반복되는 것이지만 현상은 본질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상품에 나타난 노동의 이중성이 이렇게 상품물신성으로 이어진다. "상품세계의 이러한 물신적 성격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특유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한 것처럼. 


사람들은 각자의 노동생산물을 가치로 등치시킴으로써 서로 다른 그들의 노동을 인간노동으로 등치시킨다. 모르면서 그렇게 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이 단순히 동질의 인간노동의 물적 외피(外皮)이기 때문에 서로 가치로서 관계를 맺는다고 보지 않고 그 반대로 생각한다. 즉 사람들은 그들의 상이한 생산물을 교환에서 서로 가치로 등치함으로써 그들의 상이한 노동을 인간노동으로서 동등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는 자기의 이마에 가치라고 써붙이고 있지는 않다. 가치는 오히려 각각의 노동생산물을 하나의 사회적 상형문자로 전환시킨다. 뒤에 인간은 이 상형문자의 의미를 해독하여 그들 자신의 사회적 산물[가치]의 비밀을 해명하려고 노력한다. (ㅂ판, 95; M88)


*의 日註를 보면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바꿔 쓴 말"이라고 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노동생산물이 가치인 한 그것은 그 생산에 지출된 인간노동의 단순한 물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후세의 과학적 발견"이라 함은 애덤 스미스의 공적을 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러한 상품의 물신성, 즉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노동생산물의 가치적 성격으로 나타나는 것을 밝혀내지는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노동생산물을 교환하는 당사자들은 무엇보다 교환 비율에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비율은 관습적으로 고정되며, 그렇게 되면 마치 그 비율이 생산물 자체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겨지게 된다. 


온갖 사적 노동이 끊임없이 사회적인 양적 비율로 환원되는 이유가, 생산물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사적 노동에 의한 생산물들의 우연적이고도 부단히 변동하는 교환비율을 통하여 마치 가옥이 사람의 머리 위로 무너질 때의 중력법칙과도 같은 거역할 수 없는 자연법칙으로 자신을 폭력적으로 관철하기 때문이라는 과학적 인식이 얻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상품생산이 충분히 발전해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노동시간에 따라 가치량이 결정된다는 사실은 상대적 상품가치의 현상적인 운동 뒤에 숨겨져 있는 하나의 비밀이다. 그리고 이 비밀에 대한 과학적 발견은 노동생산물의 가치량이 그냥 우연적으로 결정된다는 겉보기의 현상을 지양하기는 하지만, 노동량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는 현상 그 자체는 결코 지양하지 못한다. (ㄱ판, 138; M89)


그러므로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크기의 규정은, 상대적 상품가치의 현상적 운동 아래 은폐된 비밀이다. 이 비밀의 발견은, 노동생산물의 가치크기가 단지 우연적으로 규정될 뿐이라는 외관을 제거하지만, 이 규정의 물적 형태를 제거하지는 않는다. (일판)


Die Bestimmung der Wertgröße durch die Arbeitszeit ist daher ein unter den erscheinenden Bewegungen der relativen Warenwerte verstecktes Geheimnis. Seine Entdeckung hebt den Schein der bloß zufälligen Bestimmung der Wertgrößen den Arbeitsprodukte auf, aber keineswegs ihre sachliche Form. (MEW)


The determination of the magnitude of value by labour-time is therefore a secret hidden under the apparent movements in the relative values of commodities. Its discovery destroys the semblance of the merely accidental determination of the magnitude of the value of the products of labour, but by no means abolishes that determination's material form. (BF, 168)

 

위 인용문의 마지막 두 문장을 판본대로 비교해 보면, ㄱ판에서 "노동량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는 현상 그 자체"보다는 일판에서처럼 "물적 형태"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노동시간에 따라 가치량이 결정된다는 발견은 가치량이 우연히 결정되는 듯한 외관(겉보기)은 제거할 수 있지만 이렇게 결정되는 물적 형태를 없애지는 못한다. 




- 2013. 2. 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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