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

(ㅂ판: 제24장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




제1절 확대된 규모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상품생산 소유법칙의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으로의 전화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에서 잉여가치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잉여가치에서 자본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사용되는 것[즉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재전화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자본의 축적이라고 일컫는다. (ㄱ판, 794; M605)


본문의 방적업자 예에서 잉여가치는 4만 파운드의 실에 포함되어 있으며, 팔리면 2천 파운드스털링의 가치를 실현하게 된다. 물론 그 돈을 아무리 냄새를 맡고 뜯어보아도 그것이 잉여가치라는 건 알 수 없다. "화폐를 보아도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해서 그 소유자 손에 들어왔는지 또는 무엇이 그것으로 전화했는지 알 수 없다. 어디서 온 것이든 화폐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ㄱ판, 179~80; M124). 이렇게 새로 얻은 2천으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추가로 구입하면 모든 조건이 불변일 때 다시 400의 잉여가치가 만들어진다. 생산 규모가 확대된다. 만약 이 상황에서 자본가가 잉여생산물을 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소비기금으로 다 써버린다면 축적은 이루어지지 않고, 단순재생산만 진행된다. 


축적을 위해서는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자본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동과정에서 사용될 수 있는 물건들(즉 생산수단)과 노동자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물건들(즉 생활수단)뿐이다. 따라서 연간 잉여노동의 일부는 투하된 자본의 대체에 필요한 양을 넘는 추가적 생산수단과 추가적 생활수단의 생산에 충당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잉여생산물[이것의 가치가 잉여가치다]이 이미 새로운 자본의 물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ㅂ판, 790~91; 606~07)


앞서 제5편 절대적,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자본은 노동자들의 착취를 '외연적'으로(절대적 잉여가치 생산)든 '내포적'(상대적 잉여가치 생산)으로든 확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제 노동을 추가로 고용해야만 한다면, 자본은 이미 임금으로 스스로를 유지하고 새로 증식하기까지 하는 노동자계급을 추가적 생산수단에 결합시킨다.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그것으로 완료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하는 식의 옛이야기*와 같다. 10,000원의 최초의 자본은 2,000원의 잉여가치를 가져오는데, 이것이 자본화한다. 2,000원의 새로운 자본은 400원의 잉여가치를 가져오고, 이 잉여가치가 또 자본화해 제2의 추가자본으로 전환하며, (ㅂ판, 791; 607)


* 신약성서 마태복음 1:1~17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 아브라함부터 자손을 이어나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도달하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해당 부분을 보자. 재생산이 무엇인지 웅변하는 듯...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고, 아삽은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모스를 낳고, 아모스는 요시야를 낳고,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야김을 낳고, 엘리야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에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최초의 자본, 1만 파운드스털링, 그러니까 성경으로 말하면 아브라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경제학의 대표자들은 "그 자신의 노동과 그 선조의 노동을 통해서"라고 대답한다.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부. 노동과 소유의 일치. 


그런데 2,000파운드스털링의 추가자본의 경우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것의 발생과정을 매우 정확히 알고 있다. 그것은 자본화한 잉여가치이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타인의 불불노동 이외의 다른 곳에서 유래된 가치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추가 노동력이 결합되는 생산수단과 추가 노동력이 유지되기 위한 생활수단은 모두 잉여생산물[즉 자본가계급이 해마다 노동자계급에게서 거두어들이는 공물]의 구성부분일 뿐이다. (ㄱ판, 798; M608)


정복자로서 피정복자에게 "공물"(잉여생산물)을 탈취한 자본가는 그것으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추가로 사들여 자본을 계속 증식시킨다. 


과거의 불불노동의 소유가 이제는 [계속 증대되는 규모의] 살아 있는 불불노동의 취득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다. 자본가가 이미 축적한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그는 더 많이 축적할 수 있다.* (ㅂ판, 793; M609)


* 프랑스어판에서는, 이 뒤에 다음 문장이 추가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자본가가 과거에 타인의 불불노동을 탈취했으면 했을수록 현재에 그것을 점점 더 많이 독점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교환자들의 노동의 성과인 등가물 간의 교환이라는 것은 외관에 불과한 것으로조차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리하여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관계는 오직 유통과정에 속하는 피상적인 형식 - 내용 그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내용을 신비화시킬 뿐인 - 에 지나지 않게 된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노동력의 매매는 바로 그런 형식일 뿐이다. 그 내용은, 자본가가 계속적으로 등가 없이 취득하는 타인의 노동 - 이미 대상화되어 있는 - 가운데 일부를 계속해서 더 많은 타인의 노동으로 전화시킨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소유권이 자신의 노동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략] 소유는 이제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타인의 불불노동[또는 그 생산물]을 취득하는 권리로 나타나고,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산물을 취득할 수 없는 조건으로 나타난다. 소유와 노동의 분리는, 외견상 양자의 동일성에서 출발했던 한 법칙의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ㄱ판, 800; M609~10)


영어판에는 이어지는 ㅂ판 795~800 첫 문단(대략 M610~13)까지는 마르크스가 프랑스어판에 포함시킨 내용을 기초로 한 독일어판 제4판에 따라서 엥겔스가 추가한 것이라는 각주가 있으며 ㅂ판은 각주 없이 이를 {  }로 표시했다. ㄱ판은 그 제4판을 저본으로 한 것이므로 별다른 표시가 없다. 


등가물 간의 교환이라는 형식은 외관일 뿐, 그 실제 내용은 타인의 불불노동의 취득, 소유와 노동의 분리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취득방식이 상품생산의 원래 법칙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법칙의 위반이 아니라 적용했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게 다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 때문이다...) 노동력을 판매한 자나 구매한 자나 교환법칙에 따랐을 뿐이다. 전자는 자기 상품의 가치를 받았고 후자는 그 상품으로 창조된 가치를 소유한다. 문제될 것이 없다. 


교환법칙은 서로 양도되는 상품들의 교환가치가 동등해야 한다는 것만을 그 조건으로 한다. 게다가 교환법칙은 처음부터 이 상품들의 사용가치가 상이함을 그 조건으로 하며, 거래가 끝난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이들 사용가치의 소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처음 전화하는 과정은 상품생산의 경제적 법칙들은 물론 그것들에서 파생되는 소유권과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ㄱ판, 801~02; M611)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맏아들이 기적을 행하는* 영역은 노동의 영역이 유일한 영역은 아니다. (ㄱ판, 803; M612)


* 예수가 신의 장자(長子)로, 신자는 그 동생이라고 하는 성서의 표현을 빗댄 것으로 생각된다. 신약성서 로마서 8:29, 갈라디아서, 4:1~7 참조.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자기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으니, 이것은 그 아들이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


내가 또 말합니다. 유업을 이을 사람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어릴 때에는 종과 다름이 없고, 아버지가 정해놓은 그때까지는 보호자와 관리인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 때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에서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4:1~7)


상품생산이 그 자체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은 변증법적 역전(dialectical inversion)을 겪지 않을 수 없고 이리하여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으로 전환된다. (ㅂ판, 800; M613)


“변증법적 역전”이라는 표현은 영어판에만 나오는데, 1절에서 이제까지 논의한 대로 자본주의 생산이 발전함에 따라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이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으로 전환되는 것을 한마디로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제2절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에 관한 잘못된 경제학적 견해




자본가가 잉여가치의 일부분으로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 구입한 상품이 그에게 생산이나 가치증식*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자신의 갖가지 자연적․사회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구입한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중략] 부르주아 경제학에서는 이와 반대로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자본의 축적을 시민의 일차적 의무로 선포하고, 들어가는 비용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올 추가적 생산적 노동자를 얻는 데 수입의 전부를 [그 일부가 아니라] 지출해버리면 축적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부단히 설교하는 일이었다. (ㄱ판, 806; M614~15)


강조 부분은 문장 일부가 빠진 탓에 오역이 되었다. “추가적 생산적 노동자를 얻는 데 수입의 상당 부분을 지출하지 않고 수입의 전부를 [그 일부가 아니라] 지출해버리면 축적이 불가능해진다” 정도로 고쳐야 한다. 


* 프랑스어판의 마르크스의 주: “가치증식이라는 말은, 가치를 그 자신의 증식수단으로 하는 운동을, 가장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른 한편 부르주아 경제학은 세간의 편견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편견이란, 자본주의적 생산을 화폐축장과 혼동하고 축적된 부를 그 현존하는 현물형태의 파괴[즉 소비]를 모면한[또는 유통에서 구출된] 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략] 저 세간에 떠도는 관념의 근저에는, 일면 부자의 소비기금으로 축적되었다가 조금씩 소비되는 재화*1가 있고 또 다른 일면에는 어떤 생산양식에서나 볼 수 있는 재고의 형성이 있지만, 이것들에 관해서는 유통과정의 분석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2 (ㄱ판, 806~07; M615)


*1 프랑스어판의 마르크스의 주: “네커가 ‘사치품 및 비싼 물건’에 대해, ‘시간이 그 축적을 증대시켰다’고 하고, ‘소유법칙이 그것을 사회의 유일한 계급 아래 집중시켰다’고 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였다. 『네커 저작집』, 파리와 로잔, 1789, 제2권, 『프랑스 재정론』, 291쪽.”


*2 제2권 제6장 제2절 보관비 참조. 


애덤 스미스는 축적을 단순히 생산적 노동자에 의한 잉여생산물의 소비로서 묘사하는 것, 즉 잉여가치의 자본화는 단순히 잉여가치를 노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을 유행시켰다. [중략] 리카도와 그 이후의 모든 정치경제학자들이 애덤 스미스의 뒤를 따라 되풀이하고 있는* 주장, 즉 “수입 중 자본에 추가되는 부분은 생산적 노동자에 의해 소비된다”는 주장보다 더 큰 오류는 없다. 이러한 관념에 의하면, 자본으로 전환되는 전체 잉여가치는 가변자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ㅂ판, 802~03; M615~16)


* 애덤 스미스, 『국부론』 제2편, 제3장 참조. 


해당 부분을 보자. “한 나라의 토지와 노동의 연간생산물 중 자본을 보충하는 부분은 생산적 노동자가 아닌 사람을 부양하는 데 곧바로 사용되는 법이 없다. 그것은 다만 생산적 노동자의 임금만을 지불한다. 이윤이나 지대로써 수입을 구성하는 데 곧바로 사용되는 부분은 생산적 노동자와 비생산적 노동자를 구분함이 없이 부양할 것이다.” (A. 스미스, 『국부론』(상), 김수행 옮김, 407쪽) 정리하면, 연간생산물 가치는 불변자본+가변자본+잉여가치이고 이 잉여가치는 임금 지불과 생산수단 보충에 쓰여야 하는데, 스미스는 임금 지불(가변자본으로 지출)만을 이야기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자기의 분석에 의해 다음과 같은 엉터리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즉, 각 개별자본은 불변적 구성부분과 가변적 구성부분으로 분할되지만, 사회의 자본은 전적으로 가변자본으로만 분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사회의 자본은 전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는 것이다.*1 예컨대 직물 공장주가 2,000원을 자본으로 전환시킨다고 하자. 그는 이 화폐의 일부를 직조공의 고용에 지출하고, 기타 부분을 실․기계 등등의 구입에 지출한다. 그런데 그에게 실과 기계를 판매한 사람도 판매대금의 일부를 다시 노동에 지불한다. 그렇게 소급해 가면 결국 2,000원 전부가 임금으로만 지출된다. [중략] 이 논증의 핵심은 “그렇게 소급해 가면”이라는 말 한마디에 있는데, 이 말이 우리를 이리저리 정처 없이〔ㄱ판: 이것이 우리를 폰티우스로부터 필라투스까지〕*2 끌고 가는 것이다.*3 (ㅂ판, 804; M616)


강조한 “분해될”은 영어판에서는 resolve into인데, 이 말은 ‘분해된다’는 뜻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결국 …이 되다’로 보는 게 더 적절하겠다. 사회의 자본은 결국 가변자본이 된다는 것이다. 


*1 “스미스는” 이하는 프랑스어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축적으로부터 생기는 추가적 가치액은 다른 모든 가치액과 같은 방법으로 자본으로 전화되기 때문에, 축적에 관한 애덤 스미스의 잘못된 학설은, 확실히, 자본주의적 생산에 관한 그의 분석의 근본적 오류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다. 이것은, 그는 모든 개별 자본은 불변부분과 가변부분으로, 즉 임금과 생산수단의 가치로 나뉜다고 해도 개별자본의 총화, 즉 사회적 자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본의 가치는 반대로 그것이 지불하는 임금의 총액과 같으며, 바꿔 말하면 사회적 자본은 가변자본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2 “여기저기로, 다음에서 다음으로”를 의미한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22, 23장에서 유래한 돌려 말하기. 폰티우스 필라테(성서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의 유대 총독(기원후 26~36년 재임)이며, 그리스도가 재판을 위해 대제사장 가야바로부터 총독 빌라도에게, 빌라도로부터 헤롯 왕에게, 헤롯 왕으로부터 또다시 빌라도에게로 돌림을 당하며, 최후에 빌라도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던 데서 비롯되었다.


*3 “이 말이 우리를” 이하는 프랑스어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 말[그렇게 소급해 가면/이 과정이 계속되어]은 우리를 가야바로부터 빌라도까지 쫓아 보내고, 자본가의 수중에서 불변자본, 즉 생산수단의 가치가 없어져버리는 것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원어 발음이 어찌 되든 이 경우에는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아니라 ‘본디오 빌라도’로 옮겼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독어판에서 “폰티우스로부터 필라투스까지”로 쓴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데(본디오 빌라도라는 한 사람의 이름을 그렇게 쪼개놓았으므로), 프랑스어판에서는 “가야바로부터 빌라도까지”로 고친 걸 보면 그 점을 감안한 것 같기도 하다.


ㄱ판 각주 31(ㅂ판 각주 19)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이 “선행자들이 범했던 잘못된 분석에 대해 그 오류를 간파조차 못했다”고 비판을 받는다. 밀은 “자본 그 자체는 모두 임금이 된다”고 했다. 이렇게 애덤 스미스, 리카도, J. S. 밀까지 가차 없이 다 날려버리는데 그나마 유일하게 칭찬받는 것이 있으니 중농학파 케네의 『경제표』다. 개별 자본과 수입의 운동은 마구 뒤섞여서 추적하기가 어렵게 되는데 이 문제를 마르크스는 제2권 제3편(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유통)에서 분석하겠다고 하면서 “연간 생산을 그것이 유통에서 나올 때의 모습으로 제시하려는 시도가 중농학파의 『경제표』*에서 최초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그들의 위대한 공적”이라고 평가한다. 


* 케네의 『경제표』(1758)는 처음으로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 순환의 표식적 해명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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