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고전파 경제학 최후의 대표자. "1870년대가 될 때까지 리카도 경제학은 고전파 경제학의 핵심으로서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다(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에 대하여』, 책세상, 해제, 203쪽). 마르크스가 그를 비판하는 것을 보면 신랄함의 달인 마르크스답지 않게(?) 예의를 갖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무엇보다 그의 저작을 직접 읽는 게 우선이겠지만... 일단은 로저 백하우스의 논의(『지성의 흐름으로 본 경제학의 역사』, 시아출판사)와 『맑스사전』(도서출판 b)의 리카도 항목, 『원리』의 해제에서 발췌,  요약해본다. 리카도 저작은 왜 이렇게 번역된 게 없는지... 책세상에서 나온 『원리』도 전작이 아니고 7개 장만 뽑아 옮긴 것이다. 

리카도 경제학은 나폴레옹 전쟁(1804~15) 당시 곡물 가격과 농업지대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경작의 한계가 확대되었던 영국의 상황에 대한 대응이다. 리카도는 두 가지 명제를 설명하려 했다. 스미스가 주장했던 것과는 반대로 지주의 이해는 사회 전체의 이해와 대립된다는 것, 이윤율 저하의 유일한 원인은 경작지 부족이라는 것. (백하우스, 200~201)



리카도는 <곡물의 저가격이 자재의 이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고>(1815)에서 이윤율 하락으로 인한 축적의 정지를 막기 위해 곡물 수입이 자유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곡물법 논쟁은 1815년 의회에서 지주계급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저작으로 리카도는 애덤 스미스의 비판자에서 독자적인 경제사상 체계를 갖춘 경제학자로 등극한다.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1817)의 저술 과정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가치' 문제에 파고든다. (...)  리카도는 투하 노동량에 따라 상품의 상대 가치가 결정되는 원리는 초기 원시사회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통용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노동이 모든 가치의 기초"이며, "상대적 노동량이 상품의 상대 가치를 거의 전적으로 결정한다." (원리, 183~92) 


그는 <원리>에서 스미스에게 나타났던 투하노동과 임금의 혼탁을 극복하여 투하노동과 그 노동에 대한 보수(임금)는 별개이고 투하노동이야말로 교환가치를 규정하며 임금은 이윤(잉여가치)과 함께 교환가치를 서로 나눈다고 하는 임금·이윤 상반론을 밝혔다. 나아가 그는 지대의 본질을 비옥한 토지의 희소성이 초과이윤=지대를 발생시키는 것으로 파악하고(차액지대론), 외국무역은 각국이 그 노동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산업에 집중함으로써 쌍방에게 더 저렴한 상품을 조달할 수 있게 한다는 인식(비교생산비설)도 획득한다. (...) 맑스는 한편으로 "리카도가 계급들의 경제적 대립을 폭로했다"는 과학적 공적을 지니는 가치론=분배론을, 또 한편으로는 "자본의 역사적 임무 및 권한"을 드러내는 자본축적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 맑스는 리카도가 가치의 크기 분석에 시선을 빼앗겨 가치의 형태를 발견할 수 없었던 점, 그리고 그 원인이 부르주아사회를 "사회적 생산의 영원한 자연형태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제1장 4절 각주에 나오는 내용)에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리카도가 "과학적 공평과 진리 애호"를 가지고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의 내적 관련을 탐구한 점에서 페티 이래 영국 고전파 경제학의 최후의 대표자라는 영예를 부여하고, 리카도 이론을 자신의 정치경제학 비판론으로 재조직하는 최대의 비판 대상으로 선택했다. (『맑스사전』, 131~32)



2.  새뮤얼 베일리(Samuel Bailey, 1791~1870)

제1장 마지막에서 마르크스에게 비판받는 또 한 사람. 리카도 가치론의 비판자.

리카도는 상품의 가치는 해당 상품의 생산에 들어간 노동량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노동가치론을 주장하면서, 아울러 그러한 투하노동량에 의해 규정되는 '절대가치'와 상품들 간의 교환비율로 나타나는 '상대가치'를 구별하고자 했다. 그러나 베일리에 의하면 양자는 다른 시점에서의 가치 비교의 아포리아를 내포할 수밖에 없게 됨으로써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상대가치'의 변동의 사례를 분석하는 것으로는 '절대가치'를 그 자체로서 도출할 수 없으며, 따라서 리카도의 '절대가치'는 투하노동량이 이미 알려진 것으로 간주되는 '불변의 가치척도'의 사전 존재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투하노동량이 불변인 '불변의 가치척도'가 존재할 수 없는 이상 리카도의 '절대가치' 더 나아가서는 상품들 사이에서의 '상등물'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베일리에 의하면 가치란 바로 '두 대상 간의 하나의 관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맑스는 베일리를 평가하면서 "가변이라는 것이 바로 가치의 특징이다"라는 것을 논증하고, "상품의 가치는 전적으로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이 변하게 되면, 예를 들어 그 상품에 현실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노동시간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상품의 가치는 변화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베일리의 리카도 가치론 비판은 맑스에게는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가치는 {베일리가 말하듯이 '두 대상 간의 하나의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하나의 관계 즉 사회적인 관계의 물적 표현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이 자신들의 상호적인 생산적 활동에 대해 지니는 관계"이다. (『맑스사전』, 189~90) 



3. 빌헬름 로셔(Whilhelm Roscher, 1817~1894)


진주나 금강석 속에서 교환가치를 발견한 화학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경제학자들이 이 화학적 실체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예리한 통찰력을 자부하고 있는데, 그들에 의하면 물건의 사용가치는 물건의 물질적 속성과는 관계없이 존재하지만, 물건의 가치는 물건으로서의 그것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이와 같은 견해[엉터리 견해]를 확증해주는 것은, 물건의 사용가치는 교환 없이 [즉 물건과 사람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실현되지만, 물건의 가치는 오직 교환에서만 [즉 하나의 사회적 과정에서만] 실현된다고 하는 기묘한 사정이라는 것이다. (비봉판, 제1장 상품, 107)


이 부분에서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는 "당시 아주 잘나가던" 빌헬름 로셔라는 선생님 말씀. 마르크스보다 한 살 일찍 태어나 11년을 더 살았던, '역사학파의 창시자'라고 한다. 제2장 교환과정 각주에서도 마르크스에게 또 비판당한다. (정말 잘나갔나 보다.) 

19세기 후반부에 독일 경제학은 역사주의 운동의 지배를 받았다. 역사주의 운동은 빌헬름 로셔가 이끌던 초기 역사학파와 구스타프 슈몰러가 이끈 후기 역사학파로 나뉜다. (...) 독일에서도 고전파 경제학이 나타났지만, 리카도가 아니라 콩디야크 같은 프랑스 이론가들과 스미스에 기반했다. 역사학파의 출현 이전에 독일 경제학에서 정통은 존재하지 않았다. (...) 독일 경제학에서의 역사주의 운동을 확립한 것은 로셔의 『역사적 방법에 따른 정치경제학 강의 요강』(1843)이었다. 이 책에서 로셔는 고전파 경제학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당시 독일의 정치 및 산업 상황에서 적절하지 않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 이론은 상이한 나라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고, 더 나아가 법칙과 역사적 발전단계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초기 역사학파의 저작들은 광범위한 경험적·역사적 자료와 자신들의 이론적 논증을 혼합시킨 스미스나 밀의 관점과 확연하게 다른 점이 없었다. (『경제학의 역』, 로저 백하우스, 248~49)


강조 부분이 역사학파의 주요 견해라고 보면 될 듯... 제2판 후기를 보면 독일 경제학의 흐름에 대한 이야기가 좀 나오는데, 그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2판 후기에서 독일 경제학 관련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독일은 "자본주의적 발전과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출현을 가로막는 역사적 조건" 때문에 경제학의 토대가 부족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수입된 경제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848년 이후 독일에서도 자본주의적 생산이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하고, 독일 경제학자들의 "편견 없는 연구"는 불가능해져버린다. 1830년 이후 부르주아들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정권을 획득하고, 계급투쟁이 점점 뚜렷하고 급박해지자 "편견 없는 연구 대신 비양심적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변론들이 자리를 차지하였다."(길, 54) 한마디로 자본에 유리하냐 불리하냐가 중요하지 과학 따위 알 게 뭐냐!... 독일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프랑스와 영국보다 뒤늦게 발전했고 "이때 독일 프롤레타리아는 이미 독일 부르주아보다 훨씬 더 이론적으로 분명한 계급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부르주아 경제학이 과학으로서 가능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자마자 곧바로 다시 불가능해져버렸다."(55) 그러면서 그들은 속류경제학자 바스티아파와 J. S. 밀의 절충주의 추종파 등으로 나뉘게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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