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ㅂ판: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 일어판 편집자 주: 이 장은 프랑스어판과 독일어 제4판에서 2절로 나뉘었다. 프랑스어판의 장 제목은 '사용가치의 생산과 잉여가치의 생산'이고, 절 제목도 그에 대응한다.


노동력의 사용은 노동 그 자체이다.*


* 엥겔스가 교열한 영어판에서는, 이 문장 앞, 첫머리에 "자본가가 노동력을 사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가 추가되어 있다. 또 이 절의 제목은 "노동과정, 또는 사용가치의 생산"으로 되어 있다.

(영어판을 번역한 ㅂ판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


목적을 위한 이런 의지의 예속은 노동과정과 별개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노동이 이루어지는 전 기간 동안 노동하는 신체기관의 긴장뿐만 아니라 주의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합목적적인 의지도 계속 함께 필요하다. (ㄱ판, 266; M193)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ㅂ판, 236)


강조 부분은 일어판에서는 '일시적인'이다. "And this subordination is no mere momentary act"(MIA). 바로 다음 문장에 "노동이 이루어지는 전 기간 동안"이라든가 "기간 전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순간적'이라는 말이 맞는데, 왜 저렇게 옮겼는지...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다. 그러나 모든 노동대상이 원료인 것은 아니다. (ㅂ판, 237)


원료는 전부가 노동대상이지만, 노동대상은 모두 원료가 아니다. (ㄱ판, 267; M193)


ㅂ판처럼 고치는 게 좋겠다.


과일과 같은 완성된 형태의 생활수단[이것의 채취에는 인간의 신체기관만이 노동수단으로 기능한다]을 제외하면, 노동자가 직접 손에 넣는 것은 노동대상이 아니고 노동수단이다. (ㅂ판, 237~38)


노동자 자신의 신체적 기관들만을 노동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즉 예를 들어 과실 채취처럼 이미 이미 만들어져 있는 생활수단을 획득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노동자가 직접적으로 점유하는 대상은 노동대상이 아니라 노동수단이다. (ㄱ판, 267~68; M194)


노동수단 가지고 일하는 것에 '점유'라는 거창한 표현이 굳이 필요한지... 그리고 267쪽의 노동수단 정의하는 부분에서 "그 활동을 옮겨주는 전도체로 사용되는 물적 존재[또는 물적 존재들의 복합체]"에서 '물적 존재'는 그냥 '물건'이라고 하면 된다. (바로 다음 문장에 '다른 물체'라고 하는 건 또 뭔지.) 269, 271, 276쪽에 나오는 물적 존재도 마찬가지. 


이 물건들은 노동의 불길 속에 끌려들어가 노동유기체의 일부로 사용되고, 노동과정에서 그것들의 개념과 사명에 합치하는 기능을 수행하게끔 활기가 부여된다. 이리하여 이 물건들은 [생활수단으로 개인적 소비에 들어갈 수 있거나 생산수단으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사용가치,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로서 합목적적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ㅂ판, 243) 


그것들은 노동의 불에 단련되고 노동의 육신에 동화되며 노동과정 속에서 그들의 개념과 직분에 어울리는 기능을 부여받으면서 소모되는데, 그러나 이런 소모과정은 새로운 사용가치[즉 개인적 소비의 생활수단이나 새로운 노동과정의 생산요소로 투입될 수 있는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로서 합목적적으로 이루어진다. (ㄱ판, 273; M198)


일어판에는 편집자 주가 달려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괴테와 관련이 있다. (문제는 더 자세히 알 방법이 없다는 것...)

이 물건들은 노동의 불에 태워지고(なめられ) 노동의 육체로서 동화되어, 그것들의 개념과 사명에 어울리는 기능을 수행하기까지 그 과정 속에서 정기(精氣)가 주입되면서확실히 소비되어 사라지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생활수단으로서 개인적 소비에 들어가거나 또는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거나 하는 새로운 사용가치의,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로서, 합목적적으로 소비된다. 


'베가이스텐'은 괴테에 의해 종종 쓰이는 오래된 고어(古語). 후에 베가이스테룬이란 말로 바뀌었다.


'정기를 빨아들임'이 아마도 옛날 독어로 '베가이스텐'이라는 이야기 같은데 더 알아낼 방법이 없다. BF에서는 "infused with vital energy"라는 표현이 있다. 독어 잘 아는 분의 도움을 구합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의 일반적 조건이며,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적 조건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생활의 어떤 형태로부터도 독립되어 있으며, 오히려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적 형태에 공통된 것이다. (ㅂ판, 244)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의 보편적인 조건이자 인간생활의 영원한 자연조건이고, 따라서 [빠짐] 인간생활의 모든 사회형태에 똑같이 공통된 것이다. (ㄱ판, 273; M198)


ㄱ판에서는 강조된 부분이 빠져 있다. 


그것이 노예 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아래에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또 킨키나투스가 자신의 얼마 안 되는 토지에서 경작한 것인지 아니면 미개인9)이 돌로 야수를 때려잡은 것인지 알 수 없다. (ㄱ판, 274; M199)


위 문장은 아래와 같이 수정하는 게 좋겠다. 

그것이 노예 감시인의 잔인한 채찍 아래에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또 킨키나투스가 자신의 얼마 안 되는 토지에서 경작한 것인지 아니면 돌로 야수를 때려잡는 미개인9)이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마르크스가 토런스를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각주 9(ㄱ판)에서, 토렌스는 '토런스'로, '앞의 책'은 『부의 생산에 관한 고찰』로 고쳐야 한다. 그냥 '앞의 책'이라고 하게 되면 256쪽에 나오는 토런스의 『곡물무역론』 을 가리키게 된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ㅂ판, 247)


상품생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가치는 그것이 오로지 교환가치의 물적 토대, 곧 그 담당자이기 때문에 생산된다. (ㄱ판, 276; M201)


ㄱ판에서는 저 강조 부분이 빠졌다.


그러므로 그는 덕행의 보수는 덕행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위로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자본가는 더욱 집요하게 주장한다. (ㅂ판, 254)


그러므로 이 경우 그는 도덕성이라는 대가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 대가 때문에 그에게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ㄱ판, 283; M206)


일어판 편집자 주가 있으며 강조 부분은 번역이 다른데, 일판은 ㅂ판과 내용이 같다.

로마 궁정시인 크라우티아누스의 "진실로 덕 그 자체는 자신에 의해 보상받는다"에서 유래한 유럽 격언.


우리의 자본가는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이런 사정을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ㄱ판, 286; M208)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서재」에서 파우스트의 말 "이것은 웃음의 풀[草]이다"를 바꾼 말. 


그것이 유통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얘기하는 까닭은 그것이 상품시장에서 노동력의 구매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이 유통영역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까닭은 그 유통이 단지 생산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증식과정을 준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로 있게 된다."(ㄱ판, 287; M209)


지난번 5장에서 자본의 일반공식의 모순으로 제기된 '유통영역 내부에서 동시에 외부에서'를 명확하게 설명한 부분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는 열쇠는 한마디로 유통영역 내부에서 구매되며 유통영역 외부인 생산영역에서 가치를 증식하는 '노동력'이다.

라이프니츠 『변신론』 1의 8, "이 최선의 세계는 최선의 구성"이라는 예정조화론을 반박하기 위해 볼테르가 쓴 『캉디드』 제1, 제3, 제6, 제30장에서 유래한 말. 


자본가는 화폐를 상품으로 전화시키는데, 이 상품은 새로운 생산물의 소재를 형성하는 수단[또는 노동과정의 요소]으로 사용된다. 그럼으로써 그는 상품의 죽은 노동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합체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는 가치[즉 과거의 대상화된 죽은 노동]를 자본으로[즉 자기를 증식하는 가치로, 다시 말해 마치 애욕에 사로잡힌 듯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살아 있는 괴물로] 전화시킨다. (ㄱ판, 287; M209)


ㅂ판에서는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어판에서는 "사랑에 번민하는 몸처럼"*이다. (사랑의 정열, 번민, 이런 좋은 표현 놔두고 애욕이라니, 뉘앙스부터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라이프치히 시의 아우어바흐의 술집」에서 학생들이 합창하는 리프레인(후렴)의 가사.


브란더(식탁을 두드리며)
    조용해라! 조용해! 내 말 좀 들어보라!
    여보게들, 솔직히 말해, 난 세상물정을 좀 알거든.
    사랑에 빠진 친구들이 여기 앉아 있으니,
    그들 신분에 어울리게, 저녁 인사로
    무언가 멋진 것을 보여줘야지.
    잘 들어보라! 최신형의 노래다!
    후렴은 다 같이 힘차게 부르자!
    (노래한다)
        지하실 구멍에 쥐가 한 마리,
        지방(脂肪)과 버터만 먹고 살았네.
        배때기에 살이 통통 쪄서는,
        그 모습 영락없이 루터 박사님.
        식모가 놓아둔 쥐약을 먹고는,
        세상이 온통 답답해졌네.
        상사병에라도 걸린 놈처럼.
합창(환성을 지르며)
        상사병에라도 걸린 놈처럼. (『파우스트 1』, 문학동네, 133)


이제 가치창조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비교해 보면, 가치증식과정은 일정한 점 이상으로 연장된 가치창조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다. 만약 그 과정이 자본에 의해 지불된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에 의해 보상되는 점까지밖에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치창조과정에 불과할 것이고, 만약 그 과정이 이 점을 넘어 계속된다면 가치증식과정으로 될 것이다. (ㅂ판, 258~59)


이제 가치형성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비교해 보면, 가치증식과정은 어느 일정한 점을 넘어서 연장된 가치형성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자본에 의해 지불된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에 의해 보전되는 점까지만 후자가 계속된다면 그것은 단순한 가치형성과정이다. 가치형성과정이 이 점을 넘어서 계속된다면 그것은 가치증식과정이 된다. (ㄱ판, 287; M209)


일어판에서는 '가치형성과정'이다. ㅂ판에서는 '가치창조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이 다 쓰인다. ㅂ판에서 이 다음 문단을 보면 "더 나아가 가치형성과정을 노동과정과 비교해 보면"이라고 나오는데 같은 말을 다르게 쓴 듯하다. MIA에서는 "processes of producing value and of creation surplus-value", BF에서는 "the process of creating value with the process of valorization"이다. '가치창조'와 '가치형성'을 같은 말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복잡노동과 단순노동에 관련된 부분을 적어둔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는데 다시 보니까 중요한 내용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본가가 취득한 노동이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인지 아니면 좀더 복잡하고 좀더 고도의 특수한 비중을 가진 노동인지는 가치증식과정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평균노동에 비해 더욱 고도의 노동이나 더욱 복잡한 노동(höhere, kompliziertere Arbeit)으로 간주되는 노동은 더 많은 교육비가 들고 따라서 그 생산에 더 많은 노동시간이 드는 노동력, 즉 단순한 노동력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갖는 노동력의 발현이다. 그러므로 노동력의 가치가 더 높을 때 그 노동력은 더 고도의 노동으로 발현되고, 따라서 똑같은 시간에 상대적으로 더 높은 가치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수준 차이가 얼마이든, 보석세공 노동자가 단지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보전하는 데 필요한 노동 부분은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추가적인 노동 부분과 질적으로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잉여가치는 여전히 노동의 양적인 초과분, 즉 동일한 노동과정[곧 한편에서는 실의 생산과정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보석의 생산과정]의 시간적 연장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ㄱ판, 289~90; M212)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 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단순한 미숙련 노동력보다 많은 양성비가 소요되며 그것의 생산에 더 많은 시간과 노동이 드는]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그러나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숙련 차이가 어떻든, [보석세공 노동자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를 보상할 뿐인] 노동부분은 그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추가적 노동부분과 질적으로는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방적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석세공에서도, 잉여가치는 오직 노동의 양적 초과에 의해서만, 하나의 동일한 노동과정(한 경우에는 면사를 만들고 다른 경우에는 보석을 만든다)의 시간적 연장에 의해서만 생긴다. (ㅂ판, 261~262)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본가에 의해 취득되는 노동이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인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 더 높은(高い) 특수한 비중을 지닌 노동인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사회적 평균노동에 비해서 더 고도의, 더 복잡한 노동으로서 의의를 지니는 노동은, 단순한 노동력에 비해서 더 높은 양성비가 들고, 그 생산에 더 많은 노동시간을 요하고, 따라서 더 높은 가치를 지니는 노동력의 발휘이다. 만약 노동력의 가치가 더 높다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노동력은 더 고도의 노동에서 자신을 발휘하고, 그러므로 같은 시간 내에 비교적 높은 가치에 대상화된다. 그렇지만 방적노동과 보석세공노동 사이의 등급상의 구별이 어떻든 간에 보석세공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보전하는 데 불과한 노동 부분은 그가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추가적 노동부분과 질적으로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전자[방적노동]의 경우도 후자[보석세공노동]의 경우도 잉여가치는, 노동의 양적인 초과에 의해서만, 같은 노동과정의, 즉 한편은 실 생산과정의 다른 한편은 보석 생산과정의, 시간적 연장에 의해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일판)


ㅂ판에서만 "단순한 미숙련 노동력"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 복잡노동/단순노동의 구분이 숙련노동/비숙련노동의 구분과 그대로 대응되는가 하는 문제. 마르크스가 복잡노동과 단순노동의 예로 든 보석세공노동과 방적노동은 종류가 서로 다른 노동(다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은 같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이다. 

- 하지만 같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에서도 단순노동과 복잡노동이 있다. 

- 강화된 노동 또는 몇 곱 더 높은 노동(potenzierte Arbeit)은 숙련노동과 같은가.

이런 문제들과 관련지어서 좀더 생각해볼 것. (참고: (109) 강화된 노동, 아니 고도화된 노동의 댓글) 


복잡노동(kompliziertere Arbeit)은 그저 단순노동(einfache Arbeit)이 제곱된 것 또는 배가된 것으로 간주될 뿐이다. 따라서 적은 양의 복잡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노동과 같다. [중략] 갖가지 노동을 그 도량단위인 단순노동으로 환산해내는 여러 비율은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결정된다. (ㄱ판, 99~100; M59) 


예외적으로 생산력이 높은 노동은 몇 곱 더 높은 노동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같은 시간에 같은 종류의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한다. (ㄱ판, 444; M337)







이 제5장부터 "제3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시작된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단순/복잡노동의 구분과는 상관없이 "잉여가치는 노동의 양적인 초과" "시간적 연장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이 결론이다. 노동력 가치를 보전하는 필요노동 부분이나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잉여노동 부분이나 질적으로는 똑같다. 노동시간의 연장, 노동의 양적 초과라를 통해서 절대적 잉여가치가 생산된다.



본문에서 설명한 가치증식과정을 그림으로 간단히 정리해보자. (이 그림은 '새움'의 준웅 씨 작품이다. 감사드린다.)






위의 그림은 생산물의 가치가 투하한 자본 가치가 같다. 잉여가치를 낳지 못했다.





요술이 성공했다. 잉여가치를 낳았다. 화폐는 자본이 되었다.






- 이번 7장은 유난히 일어판 편집자 주가 많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 몇 개는 제외했다. 마 선생님 사모의 길은 참으로 힘들구나... "참된 사랑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다"고 했지만서도. 이토록 문학과 철학 등 온갖 분야를 숱하게 인용하고 패러디하는 책을 경제학 책이라고 할 수 있나. 암만해도 {파우스트}부터 사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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