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쓰인 약어


ㄱ판: 강신준 옮김, 『자본 1-1』, 도서출판 길, 2008

ㅂ판: 김수행 옮김, 『자본론 Ⅰ-상』, 비봉, 2001, 제2개역판

일판:  資本論翻訳委員会 訳, 『資本論』, 新日本出版社, 1982  

日註:  위 일본어판의 편집자 주

MIA: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ume I, Marxists Internet Archive, trans. Samuel Moore and Edward Aveling, edited by Frederick Engels, Progress Publishers 

BF: Capital vol. 1, trans. Ben Fowkes, Penguin Classics, 1992 

M1, M2, M3 …… 은 MEW(Karl Marx-Friedrich Engels Werke)판의 쪽수를 가리킴.


아울러 아래에서 강조한 부분들 중 따로 밝히지 않은 경우는 모두 내가 강조한 것.



1판 서문을 다시 읽고 정리했다. 정리하면서 무엇보다도 Metas님의 글 "<자본> 번역 비교 및 비판-'독일어 초판 서문'에 대한 부분"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감사드린다.






여기에 제1권으로 출간되는 이 저작은 내가 1859년에 출간한 『경제학 비판』(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의 속편에 해당한다. 전편과 이 속편 사이에 오랜 공백이 있었던 까닭은 몇 년 동안 계속된 병으로 내가 작업을 중간에 여러 번 중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편의 내용은 이 책의 제1장에 요약되어 있다.2  (중략)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나는 전편에서 단지 암시하는 데 그쳤던 많은 부분을 이 속편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기도 했으며 …… (ㄱ판, 43; M11)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 제일 첫 문장부터 나오는데, 바로 『경제학 비판』이다. ㄱ판에 나오는 대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로 많이 알려진 책이다. 일판에서도 "경제학 비판"이다. ㄱ판은 표지에서부터 '정치경제학 비판'이 아니고 '경제학 비판'으로 쓰는 등, '정치경제학'을 '경제학'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데, 역어로 무엇이 적당한지는 견해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로 쓰는 게 좋다고 보고,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본문 안 괄호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를 말한다는 역주라도 달았어야 한다. 보통 국역본이 이미 있는 책을 언급할 경우 독자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그 제목을 써주는 게 관례다. 그 관례를 어겨야 할 만큼 문제가 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면 옮긴이의 생각대로 제목을 달되 간단하게나마 주를 달아주는 게 좋다. ㄱ판은 왜 굳이 '경제학'이라고 썼는지 이유를 밝히지 않았고 그 책의 기존 국역본을 밝히지도 않았다. 


후주(MEW판 편집자 해설)에 나오는 설명처럼 "제1장"은 현재 판본으로는 제1편(1장부터 3장까지)이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ㅂ판에서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이며, 일판도 ㅂ판과 똑같다.


어떤 학문에서든 언제나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제1장, 특히 상품의 분석을 다루는 절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한다면, 나는 가치실체(Wertsubtanz)와 가치크기(Wertgröße)는 되도록 평이하게 분석하였다.1) 가치형태는 화폐형태(Geldform)를 완성된 모습으로 가지며 아무 내용이 없고 구조가 매우 단순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정신(Menschengeist)은 2천 년 이상이 지나도록 이것을 해명하는 데 실패하였다. (ㄱ판, 43~44; M11~12)


'학문'이냐 '과학'이냐 하는 문제는 metas님의 글에서 3.1을 보면 된다. 일판에서도 이 부분은 "과학"이다. 아는 게 없는 나로선 더 덧붙일 것이 없다. "완성된"에 관해서는 metas님의 글 3-3을. 일판에도 "완성된"이다. "가치형태--그 완성된 모습이 화폐형태이다--는 매우 몰내용적(沒內容的)이고 간단하다." 그러니까 "아무 내용이 없고"는 일판에서는 "沒內容的"이다. ㄱ판 168쪽에 나오는 "무개념적이고 물적인, 그러나 동시에 순수한 사회적인 형태"와 뭔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잘 모르겠다. 


일판에는 * 부분에 "[독일 속담]"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 속담은 정확히는 "모든 것은 시작이 어렵다"이다. 일판에서 해당 부분을 보자. "모든 것은 시작이 어렵다[독일 속담]는 것은, 어느 과학에나 해당된다." 엄밀히 따지면 일판과 ㄱ판의 각 문장은 의미가 같지 않다. 이른바 뉘앙스의 문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재현이 서평(황해문화, 2010년 겨울)에서 "서투른 번역"이라 지적한 적이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경제적 세포형태이다. 겉만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이 형태의 분석은 아주 사소한 것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사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은 미생물 해부학이 다루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작은 것이다. (ㅂ판, 4)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노동생산물의 상품형태 또는 상품의 가치형태가 그 경제적인 세포형태에 해당한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들 형태에 대한 분석이 지나치게 사소한 것만 문제 삼는 듯이 보일 것이다. 실제로 거기에서는 매우 사소한 것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시적인 해부에서 매우 사소한 것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ㄱ판, 44; M12)


metas님의 글에서 4.3 부분이다. 나올 만한 얘기는 metas님이 다 하셔서 내가 덧붙일 것은 일판 번역밖에 없다. 일판은 이렇다. "소양(교양)이 없는 자에게는, 이 형태의 분석은 그저 쓸데없이(いたずらに) 사소한(細かい) 것을 천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그렇게 자세한 천착이 중요한데, 바로 현미해부학(顯微解剖學)에서 그러한 천착이 중요한 것과 같다." 細かい는 작다, 자세하다, 사소하다 등을 뜻한다. 그 말뜻이 부정적이라면 사소하다로, 건조하게 써도 된다면 자세하다로 옮겨도 될 듯하다. "쓸데없이"란 수식어가 붙은 곳에서는 '사소한'이 나아 보이고, 학문적 천착에 관해서는 '자세한'이 적당해 보이고... 정답은 모르겠다. 


독일의 독자가 누구든지 영국의 공업·농업 노동자들의 형편에 대해 위선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든가, 독일에서는 사태가 결코 그렇게는 나쁘지 않다고 낙관적으로 자기를 위안하려 한다면, 나는 그에게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외칠 것이다. (ㅂ판, 4~5)


독일의 독자들이 영국의 산업노동자와 농업노동자들의 상태에 대해 바리새인처럼 경멸을 보내거나 독일에서는 사태가 그렇게 악화되어 있지 않다고 낙관적으로 안심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어야만 한다. "바로 당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요!" (ㄱ판, 45; M12)


영어판 모두 shrug one's shoulders인데, 어깨를 으쓱하는 몸짓은 여러 경우에 나타난다. 무관심, 경멸, 의문, 불쾌... 문맥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일판에서는 "바리새인처럼 눈살을 찌푸린다"로 나온다. 눈살은 언제 찌푸리게 되는가. 대체로 못마땅할 때, 불쾌할 때. 바리새인은 위선자를 비유하는 말이다. 바리새인은 "구약성서에서 모세의 율법 정신을 잊고 그 글자 뜻만 중시한 그리스도 시대의 유대교 일파. 위선적인 독선자의 뜻"(日註). 자기만 옳으니 남들을 하찮게 보고 경멸할 수도 있겠지만, 위의 문맥에서는 영국 노동자들의 형편에 대해 독일 독자가 어떤 느낌을 받을 것인지 생각한다면 경멸보다는 그저 단순한 불쾌감 정도일 듯. 그러니 그냥 ㅂ판처럼 옮기거나 아니면 '위선적인 바리새인처럼 눈살을 찌푸리든가' 정도로 옮기는 게 어떨지.


다른 모든 영역에서도 우리는, 나머지 서유럽 대륙 전체와 꼭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이 빚어내는 고통은 물론 그 발전이 더딘 데에서 비롯되는 고통까지도 함께 겪고 있다. 근대적인 해악들과 함께 많은 전통적인 해악들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데, 이런 전통적인 해악들은 낡은 생산양식의 잔재로부터 계속 만들어지고 있으며 더구나 이런 낡은 생산양식에는 시대착오적인 사회정치적 관계들까지도 함께 붙어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뿐만 아니라 죽은 것으로부터도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사로잡도다*(Le mort saisit le vif)! (ㄱ판, 45~46; M15)


metas님이 8.2에서 지적한 대로 '잔재'라는 표현이 나온다. Fortvegetation(獨), passive survival을 일판에서는 어떻게 했을까. '잔재'라고 명시하지는 않고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산양식"(古風で時代遅れの生産諸様式)이다.

다른 모든 분야에서는, 나머지 서유럽 대륙 전부와 똑같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뿐 아니라 그 발전의 결여 또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근대적 곤경과 나란히 일련의 전통적인 곤경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데, 이러한 곤경들은 낡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산양식이 시대에 맞지 않는 사회적 정치적 관계라는 부수물(付隨物)과 함께 존속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에 달린 日註는 "피에르 드롬(?)의 『프랑스 법언집』(1614년)에서. 그 후계자에게 아무런 법적 절차를 취하지 않고 유산을 점유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법률 격언인데, 마르크스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썼다." 죽었으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산 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법언'은 법에 관한 속담이나 격언을 뜻한다.  


독일과 서유럽 대륙의 기타 나라들의 사회통계는 영국의 통계에 비하면 형편이 없다. 그렇지만 그 통계는 메두사의 대가리가 보일 만큼은 면사포를 걷어 올려주고 있다. (중략) [영국의 공장감독관, 공중위생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영국의 의사 …… (ㅂ판, 5)


영국의 사회통계와 비교해 볼 때, 독일과 나머지 서유럽 대륙의 사회통계는 매우 빈약하다. 그렇지만 이들 빈약한 통계도 마치 베일 속에 감추어진 메두사의 머리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의 암시는 충분히 제공해주고 있다. 영국의 공장감독관, 또는 '공중위생' 상태를 보고하는 전문의사들 …… (ㄱ판, 46; M15)


metas님의 글 9.1과 9.2 부분. metas님의 지적에 공감한다. "그렇지만"이라고 써도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미흡한 건 사실. 굳이 덧붙이자면 ㄱ판은 "그렇지만"이라고 했지만 그나마 "빈약한 통계도"라고 써서 문맥이 어느 정도는 그 뜻을 살려냈다. 일판은 역시 정확하게 "그래도"다. "전문의사"는 정확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ㅂ판도 부정확하다. medical reporters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의사"일 수도 있겠지만 의사가 아닐 수도 있다. 그 시대로 돌아가서 보지 않고서야. 일판은 "'공중위생'에 관한 의사(醫事) 보고자"다. 의사(醫師)가 아니고 의사(醫事, 의료에 관한 일).


나는 자본가와 토지소유자를 결코 장밋빛으로 묘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사람들을 문제로 삼는 것은 단지 그들이 갖가지 경제적 범주들의 인격체라는 점에서만, 즉 특정한 계급관계와 계급이해의 담당자라는 점에서만 그러하다.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하나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각 개인은 그들이 설사 주관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지라도 사회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의 피조물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이들 개인의 책임은 적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ㄱ판, 47; M16)


자본가와 지주를 나는 결코 장미빛으로 아름답게 그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개인들이 문제로 되는 것은 오직 그들이 경제적 범주의 인격화, 일정한 계급관계와 이익의 담지자(擔持者)인 한에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나의 입장에서는, 다른 입장과는 달리, 개인이 이러한 관계들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ㅂ판, 6)


To prevent possible misunderstanding, a word. I paint the capitalist and the landlord in no sense couleur de rose [i.e., seen through rose-tinted glasses]. But here individuals are dealt with only in so far as they are the personifications of economic categories, embodiments of particular class-relations and class-interests. My standpoint, from which the evolution of the economic formation of society is viewed as a process of natural history, can less than any other make the individual responsible for relations whose creature he socially remains, however much he may subjectively raise himself above them. (MIA)


멜 담, 가질 지. '담지'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으면 이것뿐이다. "담지(擔持): 국악에서, 임금이 행차할 때 방향(方響)이나 교방고(敎坊鼓)를 메고 따르는 사람. 방향은 두 사람, 교방고는 네 사람이 멘다." '담지자'는 없다. 이 정도면 있을 만도 한데. daum 국어사전에는 있다. "담지자(擔持者) 생명이나 이념 따위를 맡아 지키는 사람이나 사물." 일어사전에도 '담지'는 있을 것 같지만 없다. 여하간 담지자냐 담당자냐. 나는 둘 다 그다지 문제 될 게 없다고 본다. '담당'은 어떤 일을 맡는다는 의미가 강하고 '담지'는 어떤 의식을 지닌다는 의미가 강한데, 위 문단에서 계급관계와 이해를 '맡는다'고 하든 '지닌다'고 하든 그다지 큰 의미 차이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화신'(化身)이 더 나아 보인다. BF에서는 metas님이 12.1에서 지적하신 것처럼 bearer(운반인, 전달자, 지참인)다.


책임이 적다고 보느냐, 없다고 보느냐. 일판은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하나의 자연사 과정으로 파악하는 나의 입장은 개별 인간에게 관계의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이다. 


 



* 글 작성일: 2012/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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