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농촌 주민으로부터의 토지 수탈

(ㅂ판: 제27장 농촌주민으로부터 토지수탈)






제2절(ㅂ판은 절이 아니라 제27장)은 소토지 소유 농민이 농지를 빼앗기고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환되는 것과 수탈된 토지가 목양지나 수렵지로 바뀌는 본원적 축적 과정을 보여준다. 


당시 자신의 밭을 자기 손으로 경작하여 어느 정도 유복한 생활을 누리는 소토지 소유자들은 (…) 국민 가운데 지금보다 훨씬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 총인구의 1/7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16만 명이나 되는 토지소유자들 (…) 다른 사람의 땅을 경작하는 차지농업가 수보다 많은 것으로 계산되었다. (ㄱ판, 965 각주 190; M744; ㅂ판, 984 각주 1)


사실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는 “역사 변조자” 매콜리조차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소토지 소유자의 수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많던 소토지 농민들은 어디로 갔을까... 


유럽*1의 모든 나라들에서 봉건적 재산의 중요한 특징은 최대한 많은 가신(家臣)들에게 토지를 분할하는 데 있다. 군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봉건영주의 권력도 그의 토지 크기*2가 아니라 가신의 수에 달려 있었고, 또 그의 가신 수는 자영농민의 수에 달려 있었다. (ㄱ판, 966; M745)


*1 프랑스어판에는 “서유럽”으로 되어 있다.

*2 프랑스어판에는 “지대장(地代帳)의 길이”가 “지갑이 부푼 정도”로 되어 있다. [일판은 “지대장의 길이” ㅂ판은 “지대(地代)의 양”]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를 만들어낸 변혁의 서막은 1470년경부터 1500년대 초의 수십 년 동안에 일어났다.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경이 제대로 지적했듯이 “곳곳에서 쓸모없이 집과 뜰을 가득 메우고 있던”* 봉건가신단이 해체됨으로써 보호받을 길 없는 대량의 프롤레타리아가 노동시장으로 내몰렸다. 그 자신 부르주아적 발전의 산물인 왕권이 절대적인 권력을 추구하면서 이 가신단의 해체를 강압적으로 촉진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그 해체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강대한 봉건영주가 왕권과 의회에 매우 완강하게 대항하면서, 토지에 대해 자신과 똑같은 봉건적 권리를 갖고 있던 농민을 그 토지에서 폭력적으로 내쫓고 농민의 공유지를 강탈함으로써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냈다. 그 직접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은 영국의 경우 특히 플랑드르 양모 매뉴팩처의 성장과 그에 따른 양모 가격의 등귀였다. (ㄱ판, 967; M745~46)


* 제임스 스튜어트, 『경제학원리의 연구』 제1권, 더블린, 1770, 52쪽. 


양모 가격이 오르자 양을 기르기 위해 경지가 목초지로 바뀐다. 그 경지를 소유한 농민들은 쫓겨난다. 


대법관 포테스큐의 저서와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저서를 비교해보면 15세기와 16세기 사이의 간극을 확연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손튼(Thornton)이 정확히 말한 바와 같이,*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어떤 과도기도 거치지 않고 황금의 시대에서 철의 시대로 단번에 퇴락하였던 것이다. (ㄱ판, 968; M746)


* 『과잉인구와 그 구제책』, 런던, 1846, 186쪽.


위의 저서들은 포테스큐의 『영국법의 찬미』와 모어의 『유토피아』(1516)를 말한다. 손튼(William Thomas Thornton, 정확한 표기는 손턴)은 영국의 경제학자로 존 스튜어트 밀을 추종했다고 한다. “인민의 부”를 “웅변적으로 묘사”했다는 『영국법의 찬미』는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유토피아』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각주 193(ㅂ판 각주 4)에서 언급한 부분을 살펴보자. 


“(…) 하지만 이런 가신이나 상비군 문제가 도둑질을 강요하는 유일한 원인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다른 여러 요인들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분명히 추기경님의 모국인 영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요인들 말입니다.”

“허허, 그래, 그 다른 요인들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추기경님이 물었습니다.

“양 문제이지요.” 제가 그분께 대답했습니다. “과거에 이 동물들은 아주 적은 양의 먹이만 필요로 하던 동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물들이 지금은 노골적으로 맹렬한 식욕을 발달시키고 있고, 심지어 사람까지 먹어치우는 동물들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들판, 집, 마을, 모든 것들이 이들의 목구멍 속으로 집어삼켜지고 있는 꼴이지요. (…) 그들[귀족과 시골 신사]은 이제 목초지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자신들의 사유지를 최대한 울타리로 에워싸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경작용 토지는 한 점도 남겨놓지 않습니다. 사회에 확실한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집들을 허물고 마을 전체를 파괴해버리기까지 합니다. 물론 교회들은 제외하지만 그것은 양 우리로 전용하기 위해 보호하는 것일 뿐입니다. (…) 그 결과 수백 명의 농민들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납니다. 그들은 사기나 공갈 협박을 통해 땅을 포기하기도 하고, 조직적으로 학대를 당하다가 결국은 땅을 팔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어떤 방식이든 간에 가엾은 이들 농민들은 자기 땅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 물론 그들은 항상 방랑자나 거지가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떠돌이 부랑자로 체포되어 게으르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 십상입니다.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펭귄클래식코리아, 69~71쪽)


그해(1489년)에는 경지가 소수의 목동으로 쉽게 관리할 수 있는 목초지(목양지 등)로 변하는 데 대한 청원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시한부 계약이나 종신 계약 또는 1년 계약의 차지농장(요먼Yeoman* 가운데 대다수는 이런 방법으로 생활하고 있었다)이 영주 직영지로 전환되었다. 이것이 인민을 몰락시키고, 나아가 그 결과 도시, 교회, 십일조 세금(Zehnten)의 쇠퇴를 함께 초래하였다. (베이컨, ㄱ판, 968; M747)


* 14~15세기에는 토지에서 연수(年收) 40실링을 얻는 자유토지 보유자를 가리켰지만 16세기에는 신사[紳士, gentleman: 가장 낮은 귀족 계급, 젠트리]보다 아래이고, 단순한 노동자보다는 중산 농민인 사람을 가리켰다. 


이러한 변화에 당황한 의회는 목장 경영을 저지하는 법률을 만들기도 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인민의 호소는 물론 헨리 7세 이후 150년간 계속된 입법 - 소규모 차지농업가와 농민에 대한 수탈을 막는 - 도 모두 효력이 없었다”(ㄱ판, 969; M748).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에는 교회령이라는 새로운 수탈 대상을 개척하게 된다. 


민중에 대한 폭력적 수탈과정은 16세기에 들어서자 종교개혁과 그 결과인 대규모의 교회령 약탈로 말미암아 새롭고 놀라운 추진력을 얻었다. (…) 이들은 이전의 세습 소작인들을 대거 몰아내고 소작인들의 농장을 하나로 합쳤다. 법률에 따라 교회의 십일조 가운데 빈곤한 농민들에게 보장되었던 소유권은 예고도 없이 몰수되었다. “도처에 빈민이다(Pauper ubiqubique jacet).”* 엘리자베스 여왕은 잉글랜드를 순시한 뒤에 이렇게 절규하였다. 그녀의 재위 43년, 마침내 구빈세의 시행을 통해서 빈민의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ㄱ판, 971; M749) 


* 오비디우스, 『파스티』, 제1권, 제218 시(詩)의 한 구절.


프로테스탄트 ‘정신’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토대로 그 본질을 간파할 수 있다. 잉글랜드 남부 지방에서는 몇몇 토지소유자와 부유한 차지농업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여 엘리자베스 구빈법*1의 올바른 해석에 관한 10개 항목의 질의서를 작성한 뒤 이것을 당시의 유명한 법률가 스니지 고등변호사(…)에게 제출하여 소견을 물었다. (…) 이 주를 포함하여 인근 여러 주의 다른 자영농들*2도 우리에게 가담하여 다음과 같은 법안[즉 빈민의 구금과 강제노동을 허락하고, 구금을 거부하면 구제받을 권리를 주지 않는다는 법안]을 제출하도록 자신들의 하원의원을 재촉하고 있다는 점이다. (ㄱ판, 972 각주 197; ㅂ판, 991 각주 9; M749)


*1 1601년 엘리자베스 1세 치하 제43년의 법. 그때까지 교회에 의한 빈민 구제를 대신하여, 구빈세를 징수함으로써 교육, 구제(救濟), 노인 부조(扶助) 등을 실시하고 노동능력이 있는 자에게 노동의 의무를 지웠다. 

*2 프리홀더라고 부르는 이들 농민의 보유권은 코먼 로에 의해 보호되어 일반적으로 주부(週夫) 역을 하지 않고 다른 여러 부담도 농노에 비해 가벼웠다.


17세기에도 많던 요먼리는 1750년에는 거의 사라진다. 18세기 후반에는 “농민의 공유지가 마지막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ㄱ판, 973; M750). 마르크스는 이 부분에서 이런 농업혁명의 경제적 원동력은 일단 무시하고 그 폭력적 수단(ㄱ판은 “지렛대”)만을 문제 삼는다. 


스튜어트 왕조가 복고*1되자 토지소유주들은 법률의 힘을 빌려 횡탈을 완수했는데, 대륙에서는 법률적인 힘에 기대지 않고서도 곳곳에서 이 같은 횡탈이 자행되었다. 그들은 토지의 봉건적 소유를 폐기시켰다. (…) 단지 명목상으로만 소유하고 있던 봉건적 토지들에 대해 근대적 사유권을 요구하였을 뿐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정주법(定住法)까지 강요하였다. 이 법률들이 잉글랜드 경작민들에게 끼친 영향은 - 상황의 차이를 고려하기만 한다면 - 타타르인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w)의 포고*2가 러시아 농민층에게 끼친 영향과 똑같다고 할 수 있다. (ㄱ판, 973~74; M751)


*1 스튜어트 왕조는 1603년 제임스 1세가 시작했지만 1649년 청교도혁명에 의해 왕정이 폐지되었다. 그 후 대륙에 망명했던 찰스 2세가 왕호를 칭하고 1660년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스튜어트 왕조가 부활했다. 

* 2 1597년 표트르 이바노비치 치하 - 당시 사실상의 통치자가 보리스 고두노프[폭군으로 잘 알려진 이반 4세의 뒤를 이어 잠시 러시아를 다스린 표트르의 장인으로 표트르를 대신해 섭정했다] - 에 발포된 도산농민의 수색에 관한 명령. 지주의 압박과 예속에서 도망친 농민은 이 명령에 의해 5년간 수색당해 강제로 원래 주인에게 돌려보내지게 되어 있었다.  


명예혁명*은 오렌지 공 윌리엄 3세뿐 아니라 지주와 자본가적 치부가들을 지배자의 지위에 앉혔다. 그때까지는 조심스럽게만 자행되던 국유지의 약탈을 그들은 거대한 규모로 자행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의 막을 올렸다. (…) 부르주아 자본가들은 이러한 조치를 도왔는데, 그 목적은 무엇보다도 토지를 순수한 거래대상으로 전화시키고 대규모 영농의 영역을 확대하며 농촌에서 그들에게 공급되는 보호받을 길 없는 프롤레타리아를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ㄱ판, 974; M751~52)


* 1688년 영국에 일어난 쿠데타. 이 결과 영국에는 지주귀족과 대부르주아지의 타협에 기초한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다. 


각주 202(ㅂ판 각주 14)에 나오는 “버크의 팸플릿”에 달린 日註:

* 1796년에 런던에서 발행된 팸플릿 「한 의원에게 보내는 에드먼드 버크 의원의 편지 - 이번 회기의 시작에 베드퍼드 공과 로더데일에 의해 상원에서 이루어진 버크 의원 및 그의 연금에 대한 비난에 관하여」


공유지의 약탈행위가 대규모로 이뤄지면서 당시 경제학 문헌에는 공유지 인클로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용된 문헌들을 보면 당시 공유지 인클로저의 양상과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인클로저를 반대하는 편에 선 프라이스의 말을 보자.


전반적으로 하층 인민계급의 상태는 거의 모든 면에서 악화되고 있으며, 비교적 소규모의 토지소유자와 차지농업가는 일용노동자 아니면 기껏해야 상용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다. (ㄱ판, 978; M754)


인클로저를 찬성하는 “대차지농장의 광신적 옹호자” 아버스넛은 이렇게 말한다.


소농민을 타인을 위해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그에게 더 많은 노동을 하게 만든다면, 이야말로 국민(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은 물론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들이 희망하던 이익이다. (ㄱ판, 979; M755)


그가 말하는 국민의 “이익”이란 “국민의 부Wealth of the Nation; Reichtum der Nation[즉 자본 형성과 민중에 대한 가차 없는 착취와 빈곤화]”(ㄱ판, 968; M746)와 상통한다. 수탈의 절정을 보여준 스코틀랜드 고지의 경우는 그 규모도 막대하지만 경지가 목초지로 바뀌며 게일족이 해변으로 쫓겨나 어업으로 살아가고(그나마 나중에는 해변마저 임대하여 이윤을 챙기려고 한 귀족 때문에 또 쫓겨난다), 농경지를 귀족들의 취미를 위한 수렵지로 만들었다는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경작자에게서 토지를 빼앗은 최후의 대규모 수탈과정은 이른바 토지의 청소(Clearing of Estates: 실제로는 토지에서 인간을 쓸어내는 것)였다. 지금까지 고찰해온 모든 영국적 방법은 이 ‘청소’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 ‘토지의 청소’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근대 낭만주의 문학의 약속의 땅,* 스코틀랜드 고지에서 비로소 알 수 있다. (ㄱ판, 981; M756)


* 신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한 아름다운 안주의 땅. 구약성서 「창세기」12:17, 13:14~17, 15:17~20, 17:1~8, 신약성서 「히브리서」11:9.



사슴 수렵장에 대한 로버트 서머즈의 서술에 이어지는 각주 220 중에서 “토지 청소(독일에서는 이것을 ‘농민보유지 몰수Bauernlegen’라고 한다)”에 달린 日註:


* 본서 745쪽 주 196a 참조. 


日註에서 말하는 부분은 ㄱ판 579쪽 각주 196a(M454; ㅂ판 577 각주 116). 해당 부분은 제13장 기계와 대공업, 제5절 노동자와 기계의 투쟁의 일부다. “노동자가 노동수단이나 양과 말 등에 의해 쫓겨나면서, 여기에서는 직접적인 폭력행위가 일차적으로 산업혁명의 전제를 이루었다. 먼저 노동자가 토지에서 쫓겨나고 그런 다음 양이 등장하였다. 영국에서와 같은 대규모 토지약탈은 비로소 대규모 농업을 위한 활동무대를 창출해내었다.” “이것은 독일에도 해당한다. 독일에서 대규모 농업이 이루어지는 곳, 즉 동부에서는 16세기 이래[특히 1648년 이후] 성행한 ‘농민보유지 몰수’에 의해 비로소 대규모 농업이 가능해졌다.” (ㄱ판, 579; M454~55)


교회령의 강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약탈, 횡탈적이고 무자비한 폭행에 의해 이루어진 봉건적 소유와 씨족적 소유의 근대적 사유로의 전화, 이것들은 모두 본원적 축적의 목가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위한 영역을 점령하고 토지를 자본에 통합시켰으며 도시공업에 필요한 보호받을 길 없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내었다. (ㄱ판, 986~97; M7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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