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잉여가치의 자본과 수입으로의 분할. 절욕설(節慾說)

(ㅂ판: 잉여가치가 자본과 소득으로 분할. 절제설節制說)


잉여가치를 21장에서는 자본가의 소비기금(소비재원-ㅂ판)으로서, 현재 22장에서는 축적기금(축적재원)으로서 다루고 있지만 잉여가치는 이 두 가지를 다 겸한다. 잉여가치를 소비기금과 축적기금으로 분할하는 것은 자본가의 의지에 달려 있으며, 그가 축적하는 것은 곧 치부(致富)를 위한 ‘절약’이다.  


자본가는 인격화된 자본인 한에서만 역사적 가치와 역사적 존재권 - 리히노프스키가 재치 있게 말했듯이 ‘날짜가 기록되지 않은* - 을 갖는다. (ㄱ판, 810; M618)


그런 한에서만 자본가 자신의 일시적 존재의 필연성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이행필연성에 포함되는 것이다. (ㅂ판, 806; M618)


* 슐레지엔의 반동적인 대지주 리히노프스키가 쓴 말. 그는 1848년 8월 31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폴란드 독립의 역사적 권리를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그때 이 역사적 권리에는 ‘날짜가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을 ‘어떤 날짜도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해서, 참석자들의 폭소를 받았다. 엥겔스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폴란드 토론」, 『신라인신문』 1848년 9월 1일자 참조.


ㄱ판은 오역이어서, ㅂ판은 번역이 좀 달라서, 이어진 두 문장을 따로 인용했다. “날짜가 기록되지 않은”이 아니고 ‘어떤 날짜도 없는 것은 아닌’이다. keinen Datum nicht hat(MEW); hasn’t got no date(MIA). ㅂ판의 “이행필연성”을 ㄱ판에서는 “일시적인 필연성”(transitorischen Notwendigkeit)이라고 했다. 일판은 “과도적 필연성”이다. 자본가의 과도적 필연성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과도적 필연성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인격화된 자본”이며 “가치증식의 광신자”인 자본가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새로운 사회형태의 물적 조건을 창조해낸다. 그의 치부욕은 화폐축장자(수전노-ㅂ판)와 비슷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후자는 “개인적 광기”이지만 전자는 “사회적 메커니즘의 작용”으로 나타나며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자본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자본가를 통해서 의지와 의식을 부여받는 자본의 기능에 지나지 않는 한, 자본가 자신의 사적 소비는 자본의 축적에 대한 도둑질로 간주된다. 이탈리아식 부기(簿記)로 말한다면 사적 지출은 자본에 대한 자본가의 차변(借邊)에 기입되는 것이다. 축적이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다. 축적은 착취당하는 인간재료(Menschenmaterial)의 양을 확대시키는 동시에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도 확대시킨다. (ㄱ판, 811; M619)


위 문단에 달린 각주 34(ㅂ판은 22)에 나오는 그리스 신화의 괴물들인 카쿠스, 게리온, 안타이오스에 대해서는 각각 링크 참조. 


그러나 원죄*1의 결과는 도처에서 나타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발전하고 축적과 부가 증대함에 따라 자본가는 더 이상 자본의 단순한 화신이기를 그만둔다. 그는 자신의 아담[*욕망]에게 ‘인간적인 공감*2을 느낀다. 그리고 금욕에 심취하는 것은 고루한 화폐축장자의 편견이라고 비웃도록 교육을 받는다. 고전적인 자본가는 개별적 소비를 자본가의 직분에 반하는 죄악이자 축적의 ‘억제하는 행동’으로 낙인을 찍지만, 근대화된 자본가는 축적을 자신의 향락욕에 대한 ‘금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ㄱ판, 812; M619~20)


ㄱ판의 “축적의 ‘억제하는 행동’”은 “축적 억제하는 행동” 또는 “축적의 절제(절욕)” 정도로 고쳐 읽으면 되겠다. 


*1 아담과 에바(하와)가 신을 거역해 저지른 죄는 자손인 전 인류에게 전해 내려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짊어진다고 한다. 구약성서 창세기 3:1~2 참조. 

*2 실러의 이야기시(譚詩) 「인질」(Die Bürgschaft)에서 나온 말. 


위에 나온 실러의 시는 B.C.4세기경 시라쿠사의 전제군주 디오니시오스, 다몬과 핀티아스라는 두 친구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여동생의 결혼식에 다녀오기 위해서 친구를 폭군에게 자기 대신 인질로 잡힌(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대신 친구가 사형당한다는 조건) 사형수가 온갖 시련 끝에 꼭 돌아오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다는 내용인데, 이걸 가지고 다자이 오사무가 「달려라 메로스」라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얘기하자면 길어지니까 이만 생략. 여하간 “인간적인 공감”(menschliches Rühren)이란 말은, 친구를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생각하고 약속을 지킨 데 대해 감동한 폭군의 심정을 말하는 듯.


바로 이어지는 “서로 떨어지고 싶어 하는 두 개의 영혼”은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문 앞에서」에서 좀 바꿔서 인용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자네는 오직 한 가지 충동만을 알고 있군.

오오, 결코 다른 하나의 충동을 알려고 하지 말게!

내 가슴속에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으니,

그 하나는 다른 하나와 떨어지기를 원하고 있다네.

하나는 음탕한 사랑의 쾌락 속에서,

달라붙는 관능으로 현세에 매달리려 하고

다른 하나는 억지로라도 이 속세의 먼지를 떠나,

숭고한 선조들의 광야(廣野)로 오르려 하는 것이다

- 『파우스트 1』, 이인웅 옮김, 문학동네, 75쪽


자본가와 수전노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 수전노는 '자신의' 노동이나 소비에 따라 부를 축적하지만, 자본가는 '자신이 아닌 남'(노동자)에 대해 노동이나 절약을 강요함으로써 부를 축적한다. 그의 낭비는 (수전노와 달리) 그의 축적을 방해하지 않는다. 


자본가의 낭비 〔…〕 배후에는 언제나 가장 더러운 탐욕과 세심한 타산(打算)이 숨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의 낭비는 그의 축적을 결코 방해하지 않고 축적의 증대와 더불어 증대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본가의 심중에서는 축적욕과 향락욕 사이에 파우스트적 갈등이 전개된다. (ㅂ판, 809; M620)


축적할지어다, 축적할지어다! 이것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이다!* (ㄱ판, 814; M621)


절약하라 절약하라! 즉, 잉여가치 또는 잉여생산물 중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자본으로 재전환하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 이 공식(公式)으로 고전파 경제학은 부르주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표현했다. (ㅂ판, 811; M621)


*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제1의 계율이다’라는 의미. 고대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골격을 이루는 모든 편들은 모세와 그 외 예언자들에 의해 쓰였다. 인용한 말은 여기에서 생겨났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16: 29~31, 마태복음, 22: 40 참조.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부자는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 16: 29~31)



ㅂ판 813쪽 첫 문단의 “노동자 측의 수요 감소는 그들 자신의 생산물 중 자신들을 위해서는 더 적은 몫을 차지하고, 고용주에게는 더 큰 몫을 제공하려는 그들의 의향(意向)을 의미할 따름이다”에서 ‘감소’가 아니라 ‘증가’다. 영어판에는 “Increased demand on the part of the labourers”(BF, 743)로 나온다. 일판이나 MEW(Vermehrte)도 모두 ‘증가’다. 하지만 문맥상으로는 ‘증가’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인용된 책의 원문을 확인하지 않는 한 아직은 모르겠다. 


자본가는 축적을(그러니 향락은 자제하고), 토지귀족은 소비를 하는 분업체계를 주장한 맬서스를 비판하는 리카도학파 한 사람(산업자본가의 대변자)은 산업자본가를 닦달만 하지 마라, 그런 식으로는 생산이 촉진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부분은 판본마다 약간씩 번역이 다르긴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산업자본가가 향락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다. 


산업자본가에게 맛있는 수프를 먹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가 축적에만 전념하도록 몰아세우는 것(ㄱ판, 816; M622)


산업자본가의 빵에서 버터를 빼냄으로써 그에게 축적에 대한 자극을 주는 것(ㅂ판, 812)


산업자본가로부터 맛있는 즙을 빨아들이는(착취하는) 것에 의해서 산업자본가를 축적으로 내모는 것(일판)


So unbillig er es findet, den industriellen Kapitalisten zur Akkumulation zu stacheln, indem man ihm das Fett von der Suppe weggchöpft, so notwendig dünkt ihm,...(MEW, 622)


to spur on the industrial capitalist by depriving his bread of its butter(BF, 743) 


오로지 생산, 그리고 끊임없는 생산의 확대 - 표어*는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ㄱ판, 815; M622)


일판에서는 "試し言葉"(시험하는 말)로 옮겼다. 그러니까 이걸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 길르앗과 에브라임이 전쟁하던 때, 길르앗 사람이 에브라임 사람을 분간하기 위해 ‘시보레테’(히브리어로 ‘범람하는 하천’을 의미한다)라고 말하게 해서, ‘세보레테’로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자를 에브라임 사람으로 보고 죽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함. 구약성서, 사사기 12: 5~6 참조.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을 앞질러서 요단 강 나루를 차지하였다.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이 강을 건너가게 해 달라고 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그에게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가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그에게 쉬볼렛이라는 말을 발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시볼렛이라고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요단 강 나루터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때에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사만 이천이나 되었다. (사사기 12: 5~6)

 

해협 이쪽에서는 오언주의가, 저쪽에서는 생시몽주의와 푸리에주의가 창궐했다. 속류경제학의 임종을 알리는 종은 이미 울렸다. 맨체스터에서 자본의 이윤(이자를 포함하여)은 지불하지 않은 ‘12노동시의 마지막 한 시간’의 산물*이라고 발견하기 바로 1년 전에, 시니어는 이미 또 다른 한 가지 발견을 세상에 발표하였다. (ㄱ판, 816; M623)


* 제3편 제7장(잉여가치율) 제3절 참조. 


“속류경제학의 임종”은 오역이다. 해당 문장은 “속류경제학의 시대를 알리는 종은 이미 울렸다”로 고쳐야 한다. “Die Stunde der Vulgärökonomie hatte geschlagen"(MEW), "The hour of vulgar economics had arrived"(BF, 744). 

 

그리고 오랜만에 시니어 교수님 재등장. 그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바로 ‘절욕설’이다. “자본이라는 말을 절욕(절제-ㅂ판)이라는 말로 바꾼다”고 하셨다. ‘최후의 한 시간’설보다 ‘절욕설’이 더 먼저였군. 


각주 41(ㅂ판은 29)에는 이런 시니어의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비판하거나(카제노프. 이 사람은 맬서스주의자라고 함) 일부 수용하거나(J. S. 밀) 한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다. 밀은 역시 절충주의자답게 리카도와 시니어를 함께 취했다고. 마르크스, 절대 그냥 안 넘어가고 비판한다. 밀은 헤겔의 모순(변증법)에 대해선 모르지만 흔해빠진 모순과는 매우 친숙하다고. 그다음은 더 재미있다. 


속류경제학자는, 인간의 모든 행동이 그와 반대되는 행동의 ‘절제’로 파악될 수 있다는 단순한 반성조차 해본 적이 없다. 식사는 단식의 절제이고, (...) 노동은 나태의 절제이고 나태는 노동의 절제이다. 속류경제학자들은 ‘규정은 부정(否定)이다’라는 스피노자의 명제에 관하여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ㄱ판, 817; M623)


시니어의 논리에 따르면 곡물이 전부 식량이 되지 않고 종자로 남을 수 있는 것도 자본가의 절제 덕분이요, 포도주가 발효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자본가의 절제 덕분이다. 이들 “근대적 속죄자의 자기 고행” 덕분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자본가가 “생산용구를 노동자에게 빌려준다”(!)면, 〔…〕 ‘그것들의 가치’를 사치나 그밖의 소비수단으로 탕진해버리는 대신 그것들에 노동력을 결합시켜 자본으로서 가치증식을 시킨다면, 그는 자신의 아담〔…〕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자본가계급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지의 문제는 속류경제학이 지금까지 굳게 입을 다물어온 비밀에 속한다. (ㄱ판, 818; M624)


‘아담[욕망]을 포기하는 것’ 부분을 ㅂ판은 “그는 자기 자신을 수탈한다는 것이다”로 옮겼다. 여하간 이토록 고통스럽게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 고행을 견디는 자본가 없이도 재생산,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도의 자영농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경제적 사회구성체가 다양하더라도 단순/확대재생산은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본의 축적’은 생산수단과 생산물이 자본의 형태로 노동자와 대립하는 사회가 아니면 나타나지 않는다. 


3절 마지막 각주 44(ㅂ판은 35)에서 엥겔스가 덧붙인 말이 있는데 일판에 따르면 이는 오류인 듯하다. 엥겔스가 쓴 제4판 서문에 “리처드 존스에게서 인용한 부분만은 그 원본을 찾아낼 수 없었다”(ㄱ판, 77; M42)는 말이 있는데 마르크스는 존스의 책(『국민경제학 교본』)을 멀쩡히 잘 인용해놓았다. 



제4절 잉여가치의 자본 및 수입으로의 비례적 분할과는 무관하게 

축적규모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 노동력의 착취도, 노동생산력, 

사용되는 자본과 소비되는 자본 간 차이의 증가, 투하자본의 크기



잉여가치가 자본과 수입으로 분할되는 비율이 일정하다고 전제하면, 축적되는 자본의 크기는 명백하게 잉여가치의 절대적인 크기에 따라 정해진다. (ㄱ판, 820; M625)


그렇게 달라지는 잉여가치를 결정하는 모든 요인들은 “축적의 크기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 요인들을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절제목이 그냥 그대로 요점 정리다. 


잉여가치율은 무엇보다도 노동력의 착취도에 의존한다.* (ㅂ판, 817; M626)


* 제3편 제9장 잉여가치율과 잉여가치량(M322) 참조. 


생산된 잉여가치의 양은 투하된 가변자본의 양에 잉여가치율을 곱한 것과 같다. 바꾸어 말해서 그것은 한 자본가에 의해 동시에 착취당하는 노동력의 수와 개별 노동력의 착취도를 곱한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 (ㄱ판, 425)


이제까지 잉여가치 생산을 다룬 장들에서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 같다는 것을 전제로 했지만 실제로는 “임금을 이 가치 이하로 강제로 인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임금 삭감은 “노동자의 필요소비재원을 자본의 축적재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자본가 입장에서는 줄이면 줄일수록, ‘극한(極限)’에 가까이 갈수록 좋다. 0이 되면 제일 좋겠지만 노동자가 공기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것은 수학적 의미에서 하나의 한계로, 끊임없이 접근할 수는 있으나 결코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을 이런 허무주의적인 입장으로*그들의 가격을 제로로〕까지 끌어내리는 데에서 자본의 끊임없는 경향이 드러난다. (ㄱ판, 821; M626)


Es ist die beständige Tendenz des Kapitals, sie auf diesen nihilistischen Standpunkt herabzudrücken. (M626)


위의 “한계”는 수학 용어인 ‘극한’으로 고쳐야 한다. (극한(極限): 『수학』어떤 양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어떤 일정한 값에 한없이 가까워지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허무주의적인 입장”도 이상한데, 일판은 “허무적인 입장으로” ㅂ판은 “0의 수준까지”로 썼다. nihil은 라틴어로 ‘무(無)’를 뜻한다. ㅂ판이 제일 나은 듯.


이렇듯 자본은 임금을 어떻게든 더 줄이지 못해서 안달을 한다. 왜 영국의 노동자들은 프랑스의 노동자들처럼 소박하게 고기 안 먹고 살지 못하는가, 스코틀랜드에서는 귀리죽만 먹어도 안락하게 잘만 살더라...


잉글랜드의 농업노동자는 저급한 종류의 곡물* 혼합물은 먹으려 하지 않는다. (ㄱ판, 823; M628)


* 스페인어판 역주에 따르면, 존슨 박사의 『영어사전』(1755)에는 곡물은 ‘귀리’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것은 잉글랜드에서는 일반적으로 말에게 주는 먹이였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가족의 식료품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사이의 몇십 년 동안 영국의 차지농업가들과 지주들은 농업 일용노동자들에게 임금의 형태로는 최저액 이하만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교구 구휼금의 형태로 지불함으로써 절대적인 저임금을 강요하였다.*1 영국의 도그베리*2이 임금을 ‘합법적’으로 결정하면서 꾸몄던 우스꽝스러운 연극의 한 예를 보자. (ㄱ판, 824; M628)


*1 1795년 5월 버크셔(영국 남부의 주)의 스피넘랜드 교구에 모인 같은 주의 치안판사, 빈민감독관에 의해 결의되어, 같은 해 의회에서 제도로서 채용이 허가되었던 ‘스피넘랜드제’라 부르는 제도를 가리킨다. 이후 이 제도는 전 영국에 보급되었다.

*2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에 등장하는 경찰관. 제13장 기계와 대공업(M573) 참조.   


어떤 산업부문이든 불변자본 가운데 노동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투자규모에 따라 결정되는 노동자 수에 비해 충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용노동량과 같은 비율로 증가할 필요는 없다. (ㄱ판, 825~26; M629)


* 프랑스어판에는 “노동수단”이 “노동수단류”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기계, 기구(器具), 용구, 건물, 건조물(建造物), 운수(運輸) 통신수단 등 노동수단의 총체를 의미한다“고 하는 주(註)가 있다.  


자본축적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수준이다. (ㄱ판, 827; M631)


노동생산성의 발전은 초기자본[즉 벌써 생산과정에 들어가 있는 자본]에도 반작용을 미친다. (ㄱ판, 828; M631)


불변자본 가운데 또 다른 부분인 원료와 보조재료는 한 해 동안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농업에서 생산되는 부분들은 대개 1년을 주기로 재생산된다.*1 그리하여 여기에서는 개량된 방법*2의 도입 등이 모두 추가자본과 기존의 자본에 거의 동시에 영향을 끼친다. (ㄱ판, 828; M632)


*1 프랑스어판에는 “광산 등에서 생겨난 것들이라면 더한층 단기간에 재생산된다”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다. 

*2 프랑스어판에는 “노동수단류의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개량된 방법”으로 되어 있다.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면서 구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살아 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의 효율성․규모․가치의 증대에 따라, 즉 노동생산성의 발전을 수반하는 축적에 따라, 노동은 끊임없이 증대되는 자본가치를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유지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노동의 이 자연적 능력은 [노동이 결합되어 있는] 자본의 자기보존능력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마치 사회적 노동의 생산력이 자본의 내재적 속성으로 보이며, 또 자본가에 의한 잉여노동의 끊임없는 취득이 자본의 끊임없는 자기증식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다. 상품의 모든 가치형태가 화폐의 형태로 표출되는 것과 같이, 노동의 모든 힘은 자본의 힘으로 표출된다. (ㅂ판, 827~29; M633~34)


노동생산성에 따른 자본의 축적에서도 현상에 감춰진 본질이라는 측면을 찾아볼 수 있다. 본질은 노동의 힘이지만 현상적으로는 자본의 힘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자본이 증가함에 따라 사용된 자본과 소비된 자본 사이의 차액은 증대한다. 〔…〕 노동수단이 생산물에 가치를 첨가하지 않으면서 생산물의 형성에 기여하는[즉 전체가 사용되지만 소비는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지는] 한 그것은 〔…〕 자연력과 마찬가지로 무상의 기여를 하는 셈이다. (ㄱ판, 831~32; M635)


과거 노동은 늘 자본의 형태로 분장하고 있기 때문에[즉 A․B․C노동의 수동태는 비(非)노동자 X의 능동태로 분장하기 때문에] 부르주아와 경제학자들은 과거 노동의 공로를 극구 찬양한다. (ㄱ판, 832; M635)


Da die vergangne Arbeit sich stets in Kapital verkleidet, d.h. das Passivum der Arbeit von A, B, C usw. in das Aktivum des Nichtarbeiters X, sind Bürger und politische Ökonomen voll des Lobes für die Verdienste der vergangnen Arbeit, welche nach dem schottischen Genie MacCulloch sogar einen eignen Sold (Zins, Profit usw.) beziehn muß. (MEW)


Since past labour always disguises itself as capital, i.e. since the debts owed to the labour of A, B, C etc. are disguised as the assets of the non-worker X, bourgeois citizens and political economists are full of praise for the services performed by past labour..... (BF, 757)


자본의 형태로 “분장”한다는 말은 알겠는데, 왜 갑자기 수동태와 능동태가 나오는 것일까? ㅂ판에서는 각각 ‘부채’와 ‘자산’이며, 일판에서는 ‘부채’(*불불노동)와 ‘자산’이라고 했다. 지불되지 않은 과거의 노동이라는 의미에서 ‘부채’이고, 비노동자는 그 부채를 갚지 않고 제 자산으로 쓴다는 뜻으로 보이는데, 수동태와 능동태는 비유인지 비약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여하간 이러한 기특한 과거 노동은 보수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천재 매컬럭”의 “과거 노동 임금설”. 




제5절 이른바 노동기금(勞動基金)*


* 이 제5절은 프랑스어판에는 서술이 대폭 바뀌어 있다. 특히 절의 모두에는 다음의 새로운 문장이 추가되었다. “자본가들, 그들의 공동소유자들, 그들의 가신(家臣) 및 그들의 정부는, 매년 연간 총생산물의 일대부분을 낭비한다. 게다가 그들은, 재생산적 사용에 적합하여 곧바로 사용하지는 않는 다수의 사용대상을 그들의 소비기금 속에 간직해두고, 또 그들의 개인적 서비스를 위해 다수의 노동력을 낭비한다. 따라서 부(富) 중에 자본화되는 부분은 결코 부 그 자체의 크기만큼 커지지 않는다.” 


자본이 수입과 추가자본으로 분할되는 비율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변동한다. 기능자본(사용 중인 자본)이 일정하다 하더라도 노동력이나 과학, 토지 등의 요소들이 자본에 대해 나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이제까지의 논의에서는 유통과정의 변수를 제외했고, 직접적이고 계획적으로 할 수 있는 합리적 결합도 무시했다. 그런데 고전파 경제학은 어떤가 하면...


고전파 경제학은 이전부터 사회적 자본을 고정된 영향력 수준을 가진 하나의 고정된 크기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편견을 최초로 하나의 도그마로 확정시킨 사람은 타고난 속물 제레미 벤담으로, 그는 19세기 부르주아적 상식에 대한 무미건조하고 현학적이며 수다스러운 신탁자(神託者)였다. 철학자들 사이에서 벤담이라는 인물은 시인들 가운데에서 마틴 터퍼*와 같은 존재이다. 이들 둘은 모두 영국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ㄱ판, 833; M636)


* 19세기 영국의 문필가이며 시인. 『속담 철학』(Proverbial Philosophy)으로 알려진, 공문구(空文句)의 설교가의 본보기.


日註에서 말하는 “공문구”라는 것은 아마도 각주 63(ㅂ판은 51)에서 예로 든 벤담의 말과 같은 것인 듯하다. “기독교는 ‘유용’하다. 〔…〕 기독교는 형법이 법적으로 유죄로 선고하는 비행을 종교적으로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럴듯하지만 하나 마나 한 말. 마르크스의 표현에 따르면 “붓을 들지 않는 날이 없다*는 것을 모토로 삼은 이 부지런한 남자는 이런 싸구려 글귀들로 산더미 같은 저서들을 채웠다.”


* 고대 그리스 화가 아펠레스가 매일 화필을 잡고, 예로 조금이라도 자기 그림을 고쳐 그리곤 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함.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제35권, 36의 12. 



벤담, 맬서스, 제임스 밀, 매컬럭 등이 자본을 고정된 크기로 이해하려는 것은 “가변자본을 고정된 크기로 설명하기 위해서”인데, 이들의 이러한 도그마는 노동기금(勞動基金)을 자연법칙에 고정되어 변경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그에 따라서 결국 노동자는 “사회적 부를 〔…〕 분할하는 데 개입할 권리가 없”으며 부자들이 수입을 희생해야 노동기금을 확대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들을 비판하면서도 그렇다고 이들을 속류경제학자들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선을 긋는다. 


이어서 “유동자본”(실제로는 가변자본)을 계산하는 방식에 대한 포셋의 동어반복적 논리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마르크스는 가변자본/불변자본이라는 범주는 자신이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강조한다. 당시 정치경제학은 이를 유동자본/고정자본 범주와 혼동해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본론 제2권 제2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재미는 그다지 없었지만...)







  1. sunanugi 2013.04.12 20:55

    수동태, 능동태라는 표현은 걍 쉽게 이해하면 될 듯해요.

    수동태: "[과거의] 죽은 노동"이 기계/ 불변자본의 형태로 쌓여 있는 것
    능동태: 생산과정의 적대 관계 안에서, "산 노동"에 대해서 자본이 현재 발휘하고 있는 바의 영향력(자본가의 눈 내지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는 이 영향력이 능동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

    부채와 자산으로 번역하는 것은 상당한 의역인데
    맑스 본래의 표현의 맛이 없어지네요.

    "수동태가 능동태로 변장/위장하고(sich verkleiden) 나타난다"는 표현--이런 거야말로 맑스다운 것이지요.

    • Favicon of https://gdproofreader.tistory.com BlogIcon ienai 2013.04.13 21:35 신고

      수동=기계(죽은 노동, 가치를 이전할 뿐인)와 능동=산 노동(가치를 새로 만들어내는)의 대비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일판에서 '부채'라는 말에 붙은 '불불노동'이라는 역주를 보고 '불불노동'이 '수동태'라는 표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던데, 선생님 댓글을 보고 '죽은 노동'과 수동태를 연결지으니까 자연스럽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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