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생산물에 상품이라는 성격을 부여하는 형태[따라서 상품유통의 전제가 되는 여러 형태]는 사회생활의 자연적 형태로 고착되어버리는 성격을 취하는데, 이런 고착화는 사람들이 이미 불변의 것으로 간주하는 이 형태의 역사적 성격이 아니라 그 형태의 내용을 미처 해명해내기 전에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가치량의 결정은 오로지 상품가격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그 상품의 가치적 성격을 확정시키는 것은 오로지 모든 상품이 똑같이 화폐로 표현되는 방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바로 이 상품세계의 완성형태인 화폐형태야말로 사적 노동의 사회적 성격과 개별 노동자의 사회적 관계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사실상 은폐하는 것이다. 내가 웃옷이나 구두 등이 아마포와 관계를 맺는 것은 이들이 추상적 인간노동을 일반적으로 구체화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 말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웃옷이나 구두 등의 생산자들이 이 상품들을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아마포와 - 또는 금이나 은을 대신 사용한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 비교할 때 그들은 사회적 총노동과 자신들의 사적 노동 사이의 관계를 바로 이런 불합리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ㄱ판, 138~39; M90)


노동생산물에 상품의 도장을 새기는, 그러므로 상품유통에 전제되어 있는 여러 형태들은 사람들이 이 형태들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서가 아니라 - 이 형태들은 그들에게는 오히려 이미 불변의 것으로 생각된다 - 이 형태들의 내막에 대해 해명하려 하기 이전에, 이미 사회적 생활의 자연 형태의 고정성을 띠고 있다. 그리하여 가치크기의 규정(결정)으로 이끈 것은 상품가격의 분석임이 틀림없고, 상품의 가치 성격의 확정으로 이끈 것은, 상품의 공통된 화폐표현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상품세계의 바로 이 완성형태 - 화폐형태 - 야말로 사적(私的) 노동의 사회적 성격, 그러므로 또한 사적 노동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드러내지 않고, 도리어 물적으로 감추는 것이다. 내가  웃옷, 장화 등이 추상적 인간노동의 일반적 화신으로서의 아마포와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면, 이 표현이 어리석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웃옷, 장화 등의 생산자들이 이 상품들을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아마포와 - 또는 금은과, 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 관련짓는다면, 사회적 총노동에 대한 그들의 사적 노동의 관계는 그들에게 바로 이 어리석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일판)


내 머리로는 한 열 번쯤 읽어야 이해가 될까 말까, 좀 장황한 문단이다. 인간노동의 동등성은 상품의 가치로서의 성격으로 나타난다. 노동생산물이 상품이 되는 형태는 그 내막을 사람들이 해명하기도 전에 이미 고착된다. 상품세계의 완성형태인 화폐형태는 사적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은폐한다. 아마포는 추상적 인간노동의 화신으로서 다른 상품들과 관계를 맺는다(물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사회적 총노동과 개인들의 사적 노동의 관계는 그렇게 웃옷과 아마포(또는 화폐)라는 상품들 간의 관계로(교환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며,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행하고 있을 뿐이다.  


경제학은 로빈슨 크루소를 좋아하니 리카도에게도 로빈슨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29번 각주(ㅂ판 31)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한 리카도의 로빈슨 스토리다. 

애덤 스미스와 반대로 데이비드 리카도는 노동시간에 의한 상품의 가치규정을 순수하게 이끌어내고, 이 법칙이 언뜻 보기에는 이에 매우 모순되는 것 같은 부르주아적 생산제관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리카도의 연구는 가치크기에만 국한되었는데, 가치크기와 관련하여 그는 적어도 법칙의 실현이 일정한 역사적 제전제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즉 그는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크기의 규정은 "공업에 의해 임의로 증대될 수 있고 그 생산이 무제한적 경쟁에 의해 지배되는" 상품들에만 적용된다고 말한다.

  이는 사실 가치법칙은 그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대공업생산과 자유경쟁 사회, 즉 근대 부르주아 사회를 전제로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리카도는 부르주아적 노동형태를 사회적 노동의 영원한 자연형태로 간주한다. 그는 원시시대의 어부와 사냥꾼으로 하여금 즉시 상품보유자로서 생선과 짐승을 이 교환가치들에 대상화된 노동시간에 비례해서 교환하도록 한다. 이 경우에서 그는 원시 어부와 원시 사냥꾼이 그들의 노동수단(의 가치)을 계산하기 위해 1817년 런던 증권시장에서 통하는 연리계산표를 참조한다는 시대착오에 빠진다. '오언 씨의 평행사변형'이 그가 부르주아 사회 이외에 알고 있던 유일한 사회형태인 듯하다. 비록 이러한 부르주아적 시야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리카도는 표면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밑바닥에서 나타나는 부르주아 경제를 이론적으로 날카롭게 해부함으로써 브룸 경이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리카도 씨는 다른 혹성에서 떨어진 것 같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김호균 옮김, 청사, 49~50) 


로빈슨은 기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유용노동을 한다. 그는 자신의 노동이 다양한 인간노동의 하나임을 알고 있으며, 경험을 통해 활동의 비중을 결정하고, 필요한 평균노동시간을 계산한다. 단순명료한 세계다. 


자신이 직접 창출한 부의 내용을 이루는 이들 여러 물건과 로빈슨 자신 사이의 모든 관계가 여기에서는 극히 단순명료하기 때문에 비르트(M. Wirth)조차도 별로 머리를 싸매지 않고 쉽게 이해할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 관계 속에는 가치에 관한 본질적인 규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ㄱ판, 140; M91)


비판에는 나오지 않는 이름 비르트에 간단한 日註. 

독일의 속류경제학자. 당시 런던 『타임스』 통신원. 


이번에는 "로빈슨의 밝은 섬"을 떠나 "어두컴컴한 유럽의 중세로" 가보자. 


여기에서는 상품생산을 기초로 하는 경우처럼 노동의 일반성이 사회적 형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노동의 특수성, 즉 노동의 현물형태가 곧바로 노동의 사회적 형태를 이룬다. [중략] 여기에서는 각자의 역할이 어떻게 평가되든, 그들의 노동에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는 언제나 그들 자신의 인적 관계로 나타나며, 물적 존재들간의 사회적 관계, 즉 노동생산물 간의 사회적 관계로 위장되어 있지는 않다. (ㄱ판, 141; M91~92)


농노는 자신이 영주를 위해 일하는 노동시간을 알고 있다. 영주에게 바치는 공납 역시 뚜렷한 형태로 드러난다. 노동의 현물형태(일판에서는 자연형태)가 곧바로 사회적 형태이기에, 상품생산 사회처럼 사회적 관계가 물건들 간의 관계로 위장되지 않는다. 소박한 농민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개별 노동력이 만들어내는 물건은 상품이 아니며, 그들의 개별 노동력은 "본래부터 노동 그 자체의 사회적 성격"을 띤다. 그럼 이번에는 아직은 실현되지 않은 미래로 간다. 


기분전환을 위해 마지막으로,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노동하면서 각자의 개별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인식하며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결사체를 생각해보자. 여기에서는 로빈슨 노동의 모든 특징이 재현되는데, 다만 그것이 개별적인 형태가 아니라 사회적인 형태로 재현될 뿐이다. (ㄱ판, 142; M92)


끝으로, 기분전환을 위해, 공동소유의 생산수단으로 일하며 또 각종의 개인적 노동력을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의식적으로 지출하는 자유인들의 연합체(association of free men)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로빈슨 크루소적 노동의 모든 특징들이 재현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다. (ㅂ판, 100)


Stellen wir uns endlich, zur Abwechslung, einen Verein freier Menschen vor, die mit gemeinschaftlichen Produktionsmitteln arbeiten als eine gesellschaftliche Arbeitskraft verausgaben. Alle Bestimmungen von Robinsons Arbeit wiederholen sich hier, nur gesellschaftlich statt individuell. (MEW)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 이루어진 사회다. 일판은 ㅂ판과 비슷하다. '개별적 형태'보다는 '개인적 형태'가 '사회적' 형태와 잘 대비되는 표현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이나 노동생산물에 대해서 맺는 사회적 관계가 생산에서나 분배에서나 한결같이 간단명료하다"(ㄱ판, 143; M93)


*1 상품생산자 사회의 일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는 생산자들의 생산물을 상품으로, 즉 가치로 취급함으로써 그들의 개별적 노동을 동질의 인간노동으로 환원시키는 데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추상적인 인간을 숭배하는 기독교, 특히 그것이 부르주아적으로 발전한 형태인 프로테스탄트나 이신론(理神論) 따위가 가장 알맞은 종교형태이다. 고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나 다른 고대*2 생산양식에서는 생산물의 상품으로의 전화나 그 결과로서 인간의 상품생산자로의 전화가 - 비록 공동체가 붕괴되어감에 따라 차차 그 중요성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순수한 상업민족은 에피쿠로스의 신*3이나 폴란드 사회 곳곳에 끼어 사는 유대인들처럼 고대세계에서는 오로지 틈새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 고대사회의 생산조직은 부르주아적 생산조직보다 훨씬 단순하고 투명하지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묶어주는 자연적인 혈족관계에서 아직 분리되지 않은 개별적 인간의 미성숙에 기초하고 있거나 아니면 직접적인 지배예속관계*4에 기초하고 있다. (ㄱ판, 143; M93)


*1: 프랑스어판에서는 이 앞에 "종교의 세계는 현실 세계의 반영에 불과하다"는 한 문장을 넣어 그 뒤에도 다소 말투가 바뀌어 있다. 

*2: 프랑스어판에서는 "고대 일반의"로 되어 있다. 

*3: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신들은 무수한 세계 사이의 공허한 중간계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괴롭히지 않는 행복한 불변의 생활을 보낸다고 한다. 키케로는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 제1권 제18절에서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전했다.

*4: 프랑스어판에서는 "전제주의 및 노예제의 조건들"로 되어 있다. 

이신론을 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17~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난 합리적인 종교관. 신의 존재와 진리의 근거를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것에서 구하는 이론으로, 신을 세계의 창조자로 인정하지만 세상일에 관여하거나 계시나 기적으로 자기를 나타내는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신을 부정하였다. ≒자연신교ㆍ자연신론.

 

현실세계의 종교적 반영은 모름지기 실제의 일상생활 관계가 인간들 상호간이나 인간과 자연 간의 합리적인 관계를 매일매일 투명하게 나타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소멸될 수 있다. 사회적 생활과정[즉 물적 생산과정]의 모습은 그것이 자유롭게 사회화한 인간의 산물로서 인간의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통제 아래 놓일 때 비로소 그 신비의 베일을 벗는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사회의 물질적 기초[즉 일련의 물적 존재조건]이 필요한데, 이 물적 존재조건은 그 자체 또한 장구하고 고통에 찬 발전사의 한 자연발생적 산물이기도 하다. (ㄱ판, 143; M94) 


Der religiöse Widerschein der wirklichen Welt kann überhaupt nur verschwinden, sobald die Verhältnisse des praktischen Werkeltagslebens den Menschen tagtäglich durchsichtig vernünftige Beziehungen zueinander und zur Natur darstellen. Die Gestalt des gesellschaftlichen Lebensprozesses, d.h. des materiellen Produktionsprozesses, streift nur ihren mystischen Nebelschleier ab, sobald sie als Produkt frei vergesellschafteter Menschen unter deren bewußter planmäßiger Kontrolle steht. (MEW)


ㅂ판에서는 위 인용 부분의 첫 문장이 "일상생활의 현실적 관계가 투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날 때"로 되어 있고, 일판은 "투명하게 보일 만큼 합리적인 관계"다. 봉건제 사회처럼 불합리하지도 않고 자본주의 사회처럼 불투명하지도 않은 관계. 'vergesellschaften'은 '사회화하다, 연합하다'의 뜻인데, ㅂ판은 "자유롭게 연합한 인간들"로 일판은 "자유롭게 사회화된 인간"으로 각각 다르다. 여하간 이렇게 되려면 "길고 고통에 찬 역사적 발전"의 산물인 물적 기초가 필요하다.


고전파 경제학 비판과 리카도 이야기. 불완전하기는 했지만 가치와 가치크기를 분석하는 데서 가장 우수했다는 것. 고전파 경제학은 어째서 노동이 가치로 표시되는지, 어째서 노동생산물의 가치크기가 노동시간의 길이로 측정되는지 묻지 않았다. 제2절에서 마르크스가 자랑스럽게 지적했듯이, 마르크스 이전의 경제학은 "상품에 포함된 노동의 이중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고전파 경제학도 노동을 때로는 양적으로 때로는 질적으로 고찰하므로 사실 그것들을 서로 구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노동의 단순한 양적 구별이 노동의 질적 통일성 또는 동일성(qualitative Einheit oder Gleichheit)을 전제하고, 따라서 노동의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의 환원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고전파 경제학은 깨닫지 못하였다. (ㄱ판, 144; M94)


각주 31(ㅂ판은 33번)에서 인용. 강조 부분을 비교해 보면, ㅂ판은 "노동의 질적 동일성 또는 동등성"(qualitative unity or equality; MIA), 일판은 "노동의 질적 통일성 또는 동등성"이다.   


고전파 경제학의 근본 결함의 하나는 상품, 그리고 특히 상품가치의 분석에서, 상품가치가 바로 교환가치로 되게 하는 가치형태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중략] 노동생산물의 가치형태는 부르주아 생산양식에서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또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이것을 통해 이 생산양식은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하나의 유형으로, 그리하여 역사적으로도 그 특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이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사회적 생산의 영원한 자연형태로 잘못 본다면, 가치형태와 상품형태, 나아가 화폐형태와 자본형태 등등의 특수한 성격도 필연적으로 간과하게 된다. [중략] 나는 페티 이래로 부르주아 생산관계의 내적 연관을 탐구하는 모든 경제학을 속류경제학과 대립시켜 고전파 경제학이라고 일컫는다. 이에 반해 속류경제학은 피상적인 관련 안에서만 돌아다니면서, 이를테면 가장 조잡한 현상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부르주아들의 자기 필요에 따라 과학적 경제학에 의해 오래전에 제공된 재료들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반추한다. 그 밖에도 속류경제학은 자신들의 세계를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부르주아들의 천박하고 독선적인 생각을 체계화해주고 현학적으로 치장해줌으로써 그것이 영원한 진리라고 선언해주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ㄱ판, 144~45; M95)


볼테르의 『캉디드』, 다시 나왔다. 여기의 日註:

볼테르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된 라이프니츠의 『변신론』(辯神論)에서 보이는 예정조화론의 '최선의 세계' '최선의 구조'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생각된다. 제3편 제5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중에 있는 역주 참조.   

미리 앞으로 가보면 ㄱ판 287쪽(M209; ㅂ판, 258)에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최선의 상태로 있게 된다"는 구절이 나온다. 


재미 삼아 우리의 호구 캉디드가 팡글로스 선생에게 듣는 설교를 비롯하여 곳곳에 등장하는 "최선의 세계"를 맛보려면...



고전경제학의 아버지, 페티가 나왔으니 이것도 다시 한 번 찾아보자.

상품을 이중의 형태의 노동으로 분석하는 것, 사용가치를 현실적 노동 또는 합목적적인 생산 활동으로, 교환가치를 노동시간 또는 동등한 사회적 노동으로 분석하는 것은 영국에서는 윌리엄 페티에서, 프랑스에서는 부아기유베르에서 시작되어 영국에서는 리카도로, 프랑스에서는 시스몽디로 끝나는 고전파 경제학의 1세기 이상에 걸친 연구들의 비판적 최종 성과이다. (『맑스사전』, 84;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40)


표층으로서의 현상 배후에 가로놓여 있는 본질적인 실재를 서술하는 것이 과학적 이론이라는 본질주의에 입각하는 맑스 입장에서 보면, 노동에 자리 잡고서 생산관계의 보이지 않는 "내적 연관을 탐구하는 경제학"이야말로 과학으로서의 고전경제학이게 된다. 따라서 맑스에게 고전경제학의 담당자는 착취를 이끄는 이론인 노동가치론의 선구자이기도 하며, 페티 등 이외에 스튜어트, 스미스, 케네, 튀르고, 프랭클린 등을 들고 있다. 

  맑스가 고전경제학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은 상품가격의 결정 요인을 생산에 소비된 노동시간으로 환원하는 점이다. 역으로 자본주의를 주어진 영원한 것으로 바라본 데다가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 노동의 이중성의 파악 및 가치형태의 정립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페티의 관측 가능한 사실에서 출발하는 경험론, 스미스의 4단계론에서 보이는 역사주의, 세이의 경제학 방법론으로서의 실증주의, 리카도의 연역적 방법과 비교생산비설, 지대론, 밀의 사회주의론, 많은 논자에게서 볼 수 있는 자유경쟁과 수급론 등, 맑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고전경제학 내지 고전파 경제학은 현대경제학까지 이어지는 경제이론의 보고로서 독자적인 의의를 지금도 여전히 지니고 있다. (『맑스사전』, 25)


상품형태는 부르주아적 생산의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가장 초기적인 형태이기 때문에 비록 오늘날과 같이 지배적이고 따라서 특징적인 양식은 아닐지라도 일찍부터 나타났으며, 따라서 그 물신적 성격은 비교적 쉽게 파악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중략] 중금주의는 금과 은이 화폐로서 하나의 사회적 생산관계를 표현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지 특별한 사회적 속성을 지닌 자연물의 형태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ㄱ판, 146; M97)


중금주의는 금과 은을 보면서도 화폐로서의 금은은 하나의 사회적 생산관계를, 게다가(그럼에도) 기묘한 사회적 속성을 띤 자연물이라는 형태로, 표시하는 것임을 간파하지 못했다. (일판) 


Es sah dem Gold und Silber nicht an, daß sie als Geld ein gesellschaftliches Produktionsverhältnis darstellen, aber in der Form von Naturdingen mit sonderbar gesellschaftlichen Eigenschaften. (MEW)


The adherents of the Monetary System did not see gold and silver as representing money as a social relation of production, but in the form of natural objects with peculiar social properties. (BF, 176)


"초기적인"(unentwickeltste)은 '미발달된'으로 하는 게 더 적절하다. 강조한 부분은 ㅂ판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일판은 좀 다르다. 여하간 중금주의자들은 금은이 사회적 생산관계를 표시한다는 것을 간파하지는 못했다. 기묘한 사회적 속성을 띤 자연물의 형태라는 것만 보았다는 것이다. 


만약 상품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는 인간들에게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물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물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이다. 상품으로서 우리가 교환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다. [중략] 


지금까지 어떠한 화학자도 진주나 다이아몬드 속에서 교환가치를 발견한 적이 없다. 이 화학적 실체를 발견한 경제학자들[중략]은 그러나 사물의 사용가치는 그 물적 속성과는 무관함에 반해 그 가치는 물적 존재로서 그 사물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에게 이러한 견해를 확인시켜주는 것은 특수한 상황, 즉 물적 존재의 사용가치는 교환 없이, 즉 물적 존재와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에 따라 실현되지만, 거꾸로 그 가치는 오직 교환을 통해서만, 즉 하나의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기묘한 상황이다. (ㄱ판, 147~48; M97~98)


사용가치는 인간과 물건의 관계에서 언제나 실현 가능한 물적 속성이지만 교환가치는 물건들의 사용가치가 교환되는 비율이며, 따라서 교환이라는 사회적 과정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비판하는 로셔나 베일리 등의 ) 경제학자들은 진주나 다이아몬드에서 가치(교환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교환가치가 무슨 고정된 화학적 실체라도 되는 양. 베일리는 "부(사용가치)는 인간의 속성이고 가치는 상품의 속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용가치는 인간의 속성이 아니라 인간과 물건의 관계에서 실현되는 물건의 속성이고 가치(교환가치)는 상품의 속성이 아니라 상품과 상품이 (사회적으로) 교환될 때 실현되는 속성이다. "가치는 오로지 상품과 상품 사이의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ㅂ판, 60). 경제학자들이 사용가치와 가치를 엉터리로 설명하는 것을 보면, 헛소리나 말실수를 연발하는 도그베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야경꾼 시콜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는 친절한 도그베리를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용모가 좋은 것은 환경의 덕이지만,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타고난 자질이다." (ㄱ판, 148; M98)


"인기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운명의 덕택이지만, 읽고 쓰는 것은 자연히 알게 된다"고. (ㅂ판, 107)


"남자답게 잘생긴 것은 의 선물(덕택)이지만, 읽고 쓰기는 자연히 갖추어지는 것이다."* (일판)


"Ein gut aussehender Mann zu sein ist eine Gabe der Umstände, aber lesen und schreiben zu können kommt von Natur." (MEW)


'미남으로 태어나는 것은 운이지만 읽고 쓰기는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해야겠지. 도그베리에 대한 ㄱ판의 역주는 잘못되었다. 도그베리는 치안판사가 아니고 경관이며, 실언과 말실수의 대가, 어딘가 좀 부족한 사람이다. 日註를 보면,

셰익스피어의 『헛소동』 제3막 제3장. 도그베리는 이 극에 등장하는 경찰관으로 내내 말을 잘못 쓴다. 

Umstände는 '사정, 형편'이라는 뜻이 있다. 그것을 "환경"으로 옮긴 것도 이상하지만, 무엇보다 이 인용의 원작이 셰익스피어의 『헛소동』이므로 원작을 보고 옮겼어야 한다. 『헛소동』의 원문(출처)을 보자.  

To be a well-favored man is the gift of fortune, but to write and read comes by nature. (original text)

To be good-looking is a matter of luck, but to read and write is a natural gift. (modern text)



- 2013. 2. 11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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